건축설계를 전공으로 하는 교수건축사로서 학교공간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건축계획적 이론적 측면보다는 디자인적 측면으로 학교공간을 바라보면서 여러 종류의 교육시설들에 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외국의 교육공간에 대한 모습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소박한 시골학교에 대한 설계공모 출품,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신축 학교들의 설계공모 관리용역, 특수학교를 위한 국제지명설계공모 관리용역까지 수행한 것 같다. 또한 ‘건축의 대중화’에 대한 일환으로 사용자 참여수업을 통해 다양한 관련자들의 의견을 수렴, 반영한 학교공간혁신사업에의 기술촉진자로서의 경험들을 통해 미래 교육환경의 비전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건축설계를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배움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교육시설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매우 클 것이다. 게다가 필자처럼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보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학교는 집 다음으로 익숙한 일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의 기간을 서울에서 보낸 필자에게 교육시설은 그다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건축학도가 되면서 평범했던 주변 공간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보고 해석하는 훈련을 하다 보니 점점 관심이 가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정림건축에서 실무를 시작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국제교류관과 경인여자대학교 체육관 설계에 참여하면서 교육시설을 경험해 봤지만 여자대학교의 일부 건물인지라 교육과정이라던지 건물의 사용성에 대한 고민을 그다지 진지하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후 밀라노에서 유학을 하면서 보비사(Bovisa)에 있는 건축대학 건물을 사용하면서 학교공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들에서 서서히 탈피할 수 있었던 체험적 계기가 시작된 것 같다. 특히 필자가 건축 이외에 실내디자인을 위해 수학도 했고 강사로도 일했었던 사립 디자인스쿨인 이사드(ISAD)는 과거 공장건물들을 리모델링해서 학교로 사용했었는데 이러한 경험 또한 교육공간의 다양한 가능성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졸업논문(작품)을 위한 프로젝트도 보꼬니 대학 신캠퍼스를 위한 마스터플랜 관련 디자인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육시설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러나 귀국 후 한국에서의 현실은 예상과는 달랐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과거의 학교건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들로 설계, 시공이 된 후 사용되고 있는 공간들이었다. 지역에서 다양한 공공건축물에 관심이 있었고 설계를 하는 필자에게는 학교건축 또한 중요한 공공건축물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요즘은 덜 하지만 그때만 해도 주로 어떤 용도의 건축물 설계를 잘 하시느냐라는 식의 질문을 간간히 받곤 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필자는 한 용도를 딱히 정해놓고 설계하지는 않고 상황별 요구나 과제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하는 편이라는 식으로 답을 하면서 어색한 상황을 넘겼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생활을 10년 넘게 하면서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건축설계를 하는 사람들에게 전문성과 보편성 사이에 있는 일종의 딜레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교육시설이라던지 의료시설 같은 특정 용도만을 주전공으로 학위를 받으시고 학교에 계신 분들도 있으신 것을 알고는 그나마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된 것이다.
6년 전쯤에 필자는 전라북도의 시골에 소재하는 아주 작은 학교들의 개축 설계공모를 지역에 소재하는 건축사사무소와 협업한 적이 있었다. 하나는 고창의 한 중학교였고, 다른 하나는 장수의 초등학교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설계비는 1억 내외였지만 별다른 기교 없이 CAD로만 표현하면 되는 거라 내용만 좋으면 해볼만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도전을 하게 된 것 같다. 에너지를 쏟아내어 더 몰입한 중학교에 더 애착이 가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2등을 하였고, 비교적 무난하고 평범한 해법을 제안했던 초등학교는 당선이 되었다. 폐교의 벼랑 끝을 가까스로 벗어나 개축이라는 명목으로 수명을 연장해 나갈 수 있었던 시골마을의 작은 학교를 ‘오래된 미래’라는 개념으로 설계하면서 묘하고 인상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2015년에 필자는 처음으로 연구년을 보냈는데, 교육시설과 관련해서는 가장 큰 경험을 시작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의 시행으로, 그전까지는 입찰, 턴키, BTL 등으로 설계를 해오던 행정중심복합도시의 학교들을 갑자기 설계공모로 하게 된 것이다. 인력이 한정적인 해당 교육청에서는 갑자기 많아진 신축 학교의 설계공모를 관리할만한 여력이 없던 차에, 10개가 넘는 학교들의 설계공모에 대한 관리용역을 발주하게 된 것이다. 조달청 입찰공고를 보고 필자가 소속한 대학의 산학협력단을 통해 응찰을 한 것이 연달아 낙찰되면서 관리용역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필자를 책임자로 하여 연구원급 건축사 두 분과 용역을 수행하면서 단 기간에 교육시설, 즉 학교건축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간에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 바로 전국에서 가장 좋은 컨디션에서 가장 최고 수준의 학교건축의 설계안을 총망라하는 일의 책임자이자 가장 트렌디(trendy)한 학교들의 산파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과 그 자료들을 토대로 학회에 논문도 발표하여 게재되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논문의 제목은 「행정중심복합도시 내 중학교 건축디자인의 특징에 관한 연구」로, 당시의 설계공모 당선작들에 대한 상호 비교 분석을 위주로 2017년 한국문화공간건축학회논문집에 게재되었다. 단순히 설계공모 관리용역만을 마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면 교육시설에 관한 공부의 기회가 부족하거나 없었을 수도 있었는데 그 내용의 일부들을 다시 논문을 위해 집중해서 살펴보고 분석하는 과정이야 말로 학교에 있는 필자에게는 큰 기쁨이자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교육시설과 관련해 올 한해 필자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일 중 하나는 국내 최초로 경도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한 직업교육 중심의 전국단위의 기숙형 특수학교를 건립하기 위한 국제지명설계공모의 관리용역을 완료한 것이다. ‘국제’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지명(초청)된 팀들과 심사위원 대부분이 외국인들이었고, 코로나19의 여파로 대부분의 과정을 비대면 방식으로 시도했다는 아주 이례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특히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2020년 건축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아일랜드의 그라프톤(Grafton Architects)과 한국의 공간건축의 합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이 앞으로도 계속 기억에 남을 만한 것 같고, 무엇보다도 준공 후에 애초의 목적에 맞게 잘 운영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 역시 기대가 되는 점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가적으로 최초로 시도되는 사업이니만큼 충분한 설계비 및 공사비가 갖춰지지는 못한 점과 디자인 선도사업에 걸맞게 설계의도 구현을 위한 예산 및 시스템이 부재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위와 비슷한 시기에 세종시, 엄밀히 말하면 행정중심복합도시의 4-2생활권에 세워지게 될 세종 제2특수학교 설계공모에 대한 관리용역도 완료를 하였다. 이미 1-1생활권에 운영 중인 세종 누리학교(제1특수학교)가 포화상태에 달해 그 반대편 지역에 추가 건립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기숙형은 아닌 일반적인 특수학교이긴 하지만, 국내 유수의 설계사무소의 작품이 당선되어 앞서 설명한 공주대 부속 특수학교와 비슷한 시기에 개교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교롭게도 국제 및 국내 설계공모로 진행된 2개의 특수학교에 대한 설계공모 관리용역을 완료한 입장에서 추후에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연구주제가 생긴 것 같아 더욱 완공이 기다려지는 것 같다.
필자의 이런 최근의 교육시설 관련한 노력들을 주위에서 지켜본 한 지인을 통해 우연히 학교공간혁신사업과 촉진자(facilitator)에 대해 알게 되었다. 활동은 낙후된 학교공간의 일부를 창의적이고 학생들의 꿈과 휴식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또한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반 한 사용자 참여디자인이라는 점도 필자의 관심을 끈 부분이었다. 평소에도 건축을 대학생들이 아닌 일반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적잖은 관심이 있었던 필자에게 촉진자로서 학교공간혁신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학교와 직장이 있는 대전과 세종에서의 모집공고를 놓쳐서 충남교육청의 촉진자로 먼저 활동을 시작하였다. 필자가 제일 처음으로 촉진자로 활동한 학교는 천안북중학교였다. 구도심에 위치한 역사가 오래된 학교다보니 주먹구구식으로 그대그때의 한정적인 예산으로 두서없이 고쳐서 쓰고 있는 학교로 세종시의 신축학교에 익숙해져 있던 필자에게도 처음에는 해당 학교의 물리적 환경 자체가 다소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로 상황은 매우 열악하였다. 다문화 학생 및 편부모, 조손 가정의 학생들도 많다보니 방과 후에도 딱히 곧바로 갈 데가 없는 학생들의 쉼터 및 휴게공간 등도 제대로 없는 실정이었다. 충남교육청의 경우에는 본 사업을 모 연구원에 위탁운영을 맡겨 진행을 했고, 유난히 타 교육청의 동일 사업에 비해 관련자들이 많아서 다소 의사소통 등이 힘든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천안북중학교의 경우에는 교장선생님의 큰 관심과 리더십이 순조로운 항해를 할 수 있게 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수차례 진행된 회의 때는 천안북중학교의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이하 해당 공간별 담당선생님들과 리더 및 기술촉진자(필자), 그리고 참여수업을 담당한 인근 타 학교의 미술선생님과 추후 실시설계를 담당할 건축사, 교육지원청의 담당자 외에도 연구원 담당자도 동참했다. 타 교육청의 경우와 조금 달랐던 점은 참여수업을 촉진자가 하지 않고 선생님이 했다는 점인데, 다양한 구성원의 참여적 측면에서는 긍정적이긴 하나 추후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해 디자인 안으로 반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유리되는 느낌이 있어 적절한 코디네이션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충남교육청 촉진자는 주로 교수 또는 건축사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아무래도 실내공간의 환경개선과 관련된 부분들이 많아서 인근의 대전시를 포함한 타 교육청의 경우에는 실내디자이너 또는 공간디자이너들의 참여도 있었다. 진행하면서 실질적으로 어려웠던 점 중 하나는 코로나로 인해 대면 워크숍 등에 제한이 있어 다른 사례에서는 유튜브 동영상 등을 활용해서 참여수업이나 워크숍, 회의 등을 진행한 경우도 있었다.
필자의 디자인 업무는 크게 세 공간으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도서실을 새롭게 이전 계획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 도서실 자리에 음악실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각 층 복도에 면해있는 작은 유휴공간을 활용해 학년별로도 이용할 수 있는 휴게공간(쉼터)들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우선 도서실은 일반교실 3개와 편복도를 포함하는 크기로 2층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먼저 학생들이 복도를 오가며 도서실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쉽게 인지하고 자주 입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벽체로 입구부분을 처리하면서 복도에서 보다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공간으로 초대한다는 발상으로 디자인을 시작했다.
음악실은 복도공간도 포함해 가변적 확장성을 고려하면서 아레나(arena) 형식으로 디자인 됐다. 음악 수업 뿐 아니라 다양한 댄스 및 동아리 활동들, 방과 후의 친구들과의 교류공간으로도 활용될 수 있게 고려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복도쉼터도 다른 컬러코드를 적용해 학생들의 의견 및 꿈과 끼를 표출할 수 있게 디자인되었는데, 특히 다문화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 간의 상호이해와 교류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실시설계를 마치고 곧 공사에 들어간다고 하고, 충남교육청에서는 필자와 같은 촉진자가 디자인 감리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모색 중인 상태이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도 있었지만, 국립대학교에 교수로 재직 중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계속 참여할 계획을 갖고 있다. 내년에는 충북교육청 관할의 충북여자고등학교와 대전광역시교육청의 아직은 미배정된 한 학교에 대해 촉진자로 활동할 것이다. 교수건축사로서의 사회적 재능기부라는 관대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도록 스스로 마인드컨트롤을 할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