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 김준연
컵은 쉽게 동의한다
묻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인다
너의 동의를 마시고
너를 내려놓기도 전에
너는 또 다시 동의한다
너는 계단에 동의하고
계단의 꺾어짐에 동의하고
벽지에 핀 곰팡이에 동의하고
어항과 어항 속 물고기들에 동의한다
바닥에 동의하고
바닥의 기울어짐에 동의한다
문에 동의하고
문의 열림과 닫힘에 동의한다
너를 놓쳐
산산조각난다
너는 동의한다
파편 하나하나 모두 동의한다
너를 놓친 건
실수가 아니었다
너는
역시 동의한다
- 김준연 시집 ‘고양이를 입어야 한다’ /
시인동네 / 2020년
간혹 주변 사람들이 하는 자신에 대한 비난에 쉽게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선선한 거 같지만 분명 기분이 틀려 있음이 눈에 보인다. 그럴 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니가 생각하듯이 나는 그런 사람은 아냐. 하지만 니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한테는 그렇게 대해주지.” 이것이 그들의 복수다. 모든 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무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시의 마지막의 동의는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함성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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