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우리민족은 웃어른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상경하애(上敬下愛)를 덕목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상경과 하애가 동일선상에 있지 않고 어른이 우선되다 보니 자연히 아랫사람, 특히 어린이는 부녀자와 함께 무시당해 왔다. ‘어리다’가 ‘어리석다(愚)’에서 ‘어리다(幼)로 바뀐17세기부터 어린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으나, 늙은이와 젊은이에 비해 어린이는 ‘아이’ ‘어린 것’ ‘얼라’ 등으로 ‘이’를 붙이지 않고 불려왔다.

요즈음은 노인이라는 한자어가 늙은이의 존칭어로 쓰여 지고, 늙은이라 부르면 비속어로 생각하여 싸우려 들겠지만 이는 한자나 영어 등 외래 풍조에 물들은 식자들이 흐려놓은 것일 뿐이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 나는 젊었거니 돌인들 무거울까 / 늙기도 서러웁거든 짐조차 지실까”

송강의 시조에도 초장의 ‘늙은이’와 종장의 ‘지실까’를 보면 늙은이가 존칭어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방정환은 1923년에 어린이날을 제정하면서, 애들도 늙은이와 젊은이처럼 ‘이’를 붙이고 높여 부르자고 주창한 것이다.

지금, 한국은 준비 없이 너무 일찍 찾아온 고령화 사회로 인하여 국가와 국민이 모두 몸살을 앓고 있다. 이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곳이 교회와 기업이다. 교회는 그토록 번성했던 서구의 교회들이 늙은이들로만 채워지고 그나마 교인이 없어 다른 용도로 쓰여 지는 현상을 일찍부터 보아왔기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해왔다.

기업들도 깨어있는 기업일수록 어린이 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면도기로 유명한 질레트의 광고판이 면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어린이놀이터에 세워져 있는 것은 10년 이상을 내다본 장기 광고 전략인 것이다. 이들이 청년이 되어 면도기를 사러 가면 저절로 어릴 적부터 보아온 질레트를 찾게 되는 것이다.

어린이 날 한국의 TV에는 한국 최대 기업의 공익성 광고가 떴다. “어린이날을 맞아 아이들의...” 이런 넌센스는 뉴스의 리포터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이날을 맞아 이곳을 찾은 아이들의 해맑은...” 그뿐인가 어린이들이 하나님과 같이 존경하여 따르는 목사조차도 “이번 어린이날에는 교회에서 아이들을 위한 잔치를... ”이라 광고를 한다. 소위 식자층에 있는 이들조차 평소에 얼마나 어린이들을 경시해왔기에, 어린이날에 어린이를 위한 행사조차 ‘애들’이라 부를까.

건축사들은 10월, 문화의 달에 시도별로 어린이를 위한 그리기, 만들기, 집짓기 등 다양한 건축분야활동을 주최하고 있다. 혹여 이런 실수는 없었는지 돌아 봐야겠다. 내일의 희망동이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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