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양도, 거래 상 지위의 우월함 이용한 ‘甲질 계약’
건축설계 저작권 보호에 관한 사회 전반 인식 개선 필요
공공기관의 건축설계 저작권 양도계약서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건축설계 저작권에 관한 문제는 일전부터 계속해서 제기돼 왔으며, 해당 저작권 침해는 다른 분야와 달리 주로 저작자와 발주자 사이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공공기관의 설계공모 지침서에 따르면, ‘당선작의 저작권 및 사용권 등 법적 소유권은 당해 건축설계공모에 한하여 수요기관에 귀속한다. 또한, 수요기관은 출판과 전시를 위해 별도의 허락없이 입상작을 사용할 수 있다’, ‘입상작 외의 작품의 경우에도 필요한 경우 전시 또는 출판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응모자의 요청이 있을 때에는 익명으로 처리할 수 있다’ 등의 제출 제안서 지적 소유권 항목이 포함돼 있다.
이에 한 건축사는 “저작권 양도를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설계공모 당선 시 저작권을 공식적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저작재산권 양도계약서를 요구하는 공공기관이 생각보다 많다. 공익을 위한 경우 본 저작자가 저작권을 양도해야 한다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또 “저작권 개념이 부족한 대다수 지자체 등에서는 설계비를 지불했으니 저작권을 귀속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용권만 가져가는 것이지 저작권을 가져가는 것은 위법”이라고 말했다.
실제 설계 저작물을 매수했다고 해서 저작권을 함께 매수하는 것이 아니며, 건축주가 대가를 지불하고 건축설계를 의뢰했더라도 건축설계 저작물의 저작권에 관해서는 별도의 계약 거래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설계공모 당선 후 계약 절차에서 저작권 양도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으면 계약을 할 수 없는 공공기관이 많아 많은 이들이 마지못해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현실이다.
본지가 입수한 모 공공기관의 ‘저작물 저작재산권 양도 계약서’에는 ‘양도자(설계자)’가 제작한 저작물에 관한 저작재산권 일체(복제권, 공연권, 공중송신권, 전시권, 배포권, 대여권 등) 및 2차 저작물 작성권을 양도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저작재산권 양도를 요구하는 항목은 설계보고서와 원본파일(결과보고서 작성파일-CAD, HWP, PDF, PPTX, JPEG 등) USB 등 용역과 관련된 저작물 일체다.
계약서 상의 저작권 양도 취지는 ‘창작 산출물의 저작재산권 전부를 연구 수행자로부터 양도받아 국민 공공정보 활용을 용이하게 하고 창조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함’이다. 저작권법 제24조의2(공공저작물 자유이용)와 공공데이터의 제공 및 이용활성화에 관한 법률 시행(’13.10.31.)에 따라 공공기관이 저작재산권을 전부 확보한 공공저작물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변형해 영리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이에 앞서 언급한 취지에 따라 용역 결과로 창작된 산출물의 저작재산권 전부를 양도받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모 건축사는 “양도계약서에 ‘저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원 저작자가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는 조항이 꼭 따라온다. 문화재청, 서울시 등에서도 이렇게 진행하고 있는데, 노예계약서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양도계약서에 따르면, 양도자가 제3자의 저작물을 이용한 경우 해당인에게 저작재산권을 양도받거나 이용허락을 받아 ‘발주처’ 등이 해당 결과물을 이용할 때 법 또는 기술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하며,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에 법적 책임을 진다. 또 저작권법에 따른 복제·배포·대여·공연·방송권 등의 양도에 대해 저작인접권자로부터 동의를 받는 것도 양도자의 역할이며, 해당 저작물의 일부 또는 양도·이용 허락을 한 사실이 있어서도 안 되고, 손해가 발생할 경우 양도자는 이를 배상할 책임을 지게 된다.
저작권 양도에 그치지 않고 모든 책임은 원 저작자가 지게 됨으로써 권리는 없이 책임만 떠안게 되는 일이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는 것. 공공기관에서 이러한 일이 자연스레 발생하다 보니, 건축설계 저작권에 관한 설계 위탁자의 인식은 더 옅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auri에서 발간한 ‘알기 쉬운 건축설계 저작권(2017)’에서는 “저작자의 ‘저작재산권’ 일체가 별도의 합의나 대가 지불 없이 침해당하는데,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발주자가 거래 지위 상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에 저작자의 권리는 쉽게 간과된다”고 꼬집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에 일각에서는 지식재산권을 원 저작자인 건축사들에게 확보해 주어야 건축산업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고 있다. 건축 저작권 침해로 정당한 노력의 대가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저작자의 창작의지를 저하시켜 건축설계 품질을 떨어뜨리고, 나아가 건축문화와 건축 산업의 퇴보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건축설계 저작권 보호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