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를 들여온 경상북도 호촌리 사문진 나루터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마을에 있는 사문진 나루터는 조선 인조 때 개척됐다. 낙동강이 범람하면서 여기저기 늪이 생겨 ‘늪 마을’이라 불렸으며, 120여 년 전에는 이 씨라는 선비가 마을 앞 큰 호수를 보고 ‘호촌’이라 불렀다고도 전해진다. 낙동강이 범람할 땐 흙을 많이 훑어간다고 해서 ‘흙촌’이라고도 일컬었다. 그러나 1906년에 고령군으로 편입되고 1914년에 행정구역이 통폐합됨에 따라 사천동, 사동, 사문(沙門), 사문(寺門) 등으로 바뀌었다.
조선 전기에 사문진 나루터는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충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낙동강은 일본 무역상들은 물론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상인들의 대표적인 물품 수송로였는데, 그중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1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를 잇는 사문진 나루터가 가장 번창해 1486년까지 무역의 중심지였다.
일본에서 유입되는 물품을 보관하는 화원창과 왜물고가 사문진 나루터에 설치된 적도 있었으나 사무역의 발달로 15세기 후반에 폐쇄됐다. 해방 이후까지는 부산의 구포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를 들여온 곳 또한 바로 사문진 나루터다. 1901년 5월 이른 아침 피아노 한 대가 어설프게 포장된 상태로 인부 30여 명에 의해 소달구지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나무 안에 죽은 귀신이 있어 괴상한 소리를 낸다 하며 신기해했다. 피아노의 주인은 당시 동산병원(현 계명의료원)을 세운 존슨의 아내 에디드 파커였다.
1940년 초까지는 전국의 물자들이 사문진 나루터를 통해 대구로 운반됐다. 당시 대구에 집산된 물자는 쌀, 콩 등의 곡물류와 잡곡을 비롯해 우피, 소금, 석유, 성냥, 직물류, 약재, 잡화 등이었다. 이것들의 약 5분에 2가 대구 시장으로 소비됐고, 나머지 5분의 3 정도는 낙동강을 통해 부산 및 경북 북부 지방과 강원도 각지로 수송됐다. 이후 철도가 개통되고 대구 이출입 화물을 철도편에 빼앗기게 되면서 사문진 나루터는 대구와의 관계가 끊어지게 됐다.
한편 1985년 6월 1일 도입된 철선의 규모는 10톤급으로, 한 번에 60명의 승객과 차량 6대를 운반할 수 있었다. 승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대에는 1시간에 3-4회, 낮 시간대는 시간당 1회 정도 고령과 달성을 오갔다. 당시 하루 평균 백여 대의 차량과 천여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도선이 운항될 때만 해도 여름철이면 대구 시민들은 고령 쪽 낙동강 모래사장을 찾았다. 1978년 8월엔 사문진 나루터를 이용한 사람이 8.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93년 7월 1일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이러한 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울러 사문진교의 준공과 동시에 한여름 나루터 근처 모래사장을 찾던 피서객들도 자취를 감췄다. 현재 사문진 나루터가 있던 곳 위에는 4차선으로 확장·개통한 사문진교가 설치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