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地域主義)’는 사전적 의미로 ‘지역의 특수성을 살리고 지역 내의 자치성을 추구하는 주의’ 또는 ‘같은 지방 출신자끼리 동아리를 지어 다른 지방 출신자들을 배척, 비난하는 사회병리 현상’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주의는 아마도 인류가 태어나면서부터 발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명칭은 19세기 후반에 산업혁명과 근대국가들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났으며, 서유럽에서는 60, 70년대에 지역주의 운동으로 절정을 맞았으며, 1990년 이후에는 동유럽 각국에서 지역주의 운동과 결코 구분이 쉽지 않은 민족적 분리주의 운동으로 발생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90년대 초에 초원복국 사건으로 유명해진 지역감정의 조장으로 선거때마다 지역주의가 지역감정, 지역패권, 지역분할의 형태로 정치, 경제에서도 주요화두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선거철에 유독 지역주의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선거철에도 이런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험지에서 외로운 싸움과 행보를 걷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부분은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4월에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도 선거양상만 보면 동서로 분명하게 나뉘었지만 지역주의와는 전혀 다른 결과로 신문의 사설들은 얘기한다.
그러면 우리 건축계는 어떠한가 묻고 싶다. 좋은 건축과 좋은 건축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하며, 많은 건축계의 잠재된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하지만 여러 건축 단체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목소리는 비슷하지만 서로 다르며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음을 지난 수년간 많이 보아왔다. 그러는 와중에 건축계는 여러 분야로 세분화되고 업무범위 또한 축소되고 있다.
지금의 설계물량은 파레토법칙처럼 전체 건축사사무소의 20%가 80%의 일을 수주하며, 80%의 설계사무소가 20%의 일을 수주하기 위해서 힘겨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지역의 건축계 또한 20%의 업역을 지키기 위해 지역의 업역을 넘보는 것에 대해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례로 우리는 다양한 건축프로세스를 통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프로젝트 하나 진행할 때마다 많게는 10개 남짓한 협력업체와 협업을 하게 된다. 이런 외주 협렵업체의 비용과 제도에 따른 각종 심의, 인증, 인허가절차 등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지만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설계를 진행하고 감리를 진행하게 된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건축물 하나하나를 마무리 지어간다.
하지만 미국 양키즈의 유명한 야구선수인 요기 베라(Yogi Berra)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처럼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사용승인검사다.
건축법에 나와 있는 현장조사업무를 관할 지자체를 대신해서 지역건축사회에서 업무대행을 하고 있다. 관할 지자체에서 허가한 기준대로 시공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이다. 법적인 용어로는 사용승인검사 또는 업무대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관내 건축사 이외의 건축사가 부르는 이름은 특검이라고 칭한다. 특검! 특별검사! 특별검사원!
왠지 검사에게 심문받는 느낌은 무엇일까? 법을 법대로 해석하고 웃으면서 만날 수는 없는 건지 어쩔 수 없이 학연, 혈연, 지연을 통해서 접근을 시도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특검으로 칭하는 분들은 대게 어떠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그냥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렇듯 사용승인검사조서라는 명명 하에 지역 건축사 이외에는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제는 감리업무에 대해서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건축사의 업무영역은 해가 거듭될수록 업역이 세분화되고 있다. 각종 인증, 건축물관리점검, 해체공사감리, 그린리모델링 등 많은 좋은 정책들이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시행되고 있다. 이제는 지역이라는 한계를 넘어 건축계가 새롭게 나아갔으면 한다. 어쨌거나 지역주의는 다양한 정치, 사회, 역사, 문화적 맥락 속에서 발생했으며, 앞으로도 인간의 기본적 생활공간으로서 지역이 존속하는 한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지역주의를 지역의 업역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닌 지역의 특색, 색깔, 성격을 부여하는 건축계가 되었으면 한다. 이러한 지역주의를 지향했을 때 우리 건축계가 더 긍적적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싶다.
1990년대에 동유럽 각국이 지역주의를 표방하며 민족적 분리운동으로 나라 안팎이 어지러웠을 때, ‘코스모스’의 저자인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당시 명왕성을 지나고 있던 보이저 1호의 망원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지구의 모습을 찍어보자고 하였다. 그저 ‘창백한 푸른점’에 불과한 지구에서의 보잘것없는 존재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싶었을까. 우리 건축계도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