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열 건축사
배종열 건축사

시간을 들여서 가고 싶은 국내 유명작가의 건축물이 많지 않다. 오히려 소규모 작품 답사를 좋아한다. 작품마다 느껴지는 고민의 흔적, 시공자의 몰이해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했을지 보일 때면 손이라도 잡고 싶다. 특히 요즘 돋보이는 재생, 리모델링을 답사할 때마다 그들의 사고의 층이 얼마나 깊은지 감탄하게 된다. 한 번에 읽히지 않고 보고 다시 보아야 한 겹씩 보인다. 

유명하지 않은 건축사의 작은 주택이 감동을 준다. 그들은 내부든 외부든 공간의 가능성을 제시하려 한다. 일부 독창적인 해석의 건축물을 제외하면 건축을 패션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런 계획이 필요한 용도가 있지만, 끊임없이 등장하는(내부공간과 상호 관계하지 않는) 벽돌건물의 영롱 쌓기, 노출콘크리트 가벽, 무의미한 매스의 반복은 지루하다.

건축은 모방에서 시작되겠지만, 그대로 베끼긴 부끄러워 디자인 모방을 숨기려 한 오묘한 장난. 그리고 작품사진을 위해 건축주의 주머니를 터는 디테일 싸움은 건축의 퇴보를 초래하고, 형태와 공간의 정합성 없는 건축물을 양산한다. 주목받는 대형 건축사사무소의 작업 중엔 놀라운 작품들도 많지만, 일부 중요 건물들은 외국에서 계획안을 가져온다고 한다. 물론 건축주의 요구일 수도 있지만, 대형 건축사사무소의 인재들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창의적 고민이 보장되지 않는 사무소의 여건상 짜깁기의 반복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게 되었으리라. 도시적 측면에서 패션의 경향도 있어야 하겠지만, 내부공간으로부터 건축이 설명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보여줄 수 있는 것엔 표피도 있겠지만, 그 외에도 공간의 아름다움이나 도시와의 관계 설정, 자연을 품은 건축 등 다양할 것이다. 우리는 보여줄 게 많고 그것이 훌륭한 건축으로 평가받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디자인’이나 ‘패션’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뭔가 단지 파사드를 만드는 진지하지 않은 느낌이랄까? 지면에 낼 사진을 정리하다 보면 설계할 때 무엇에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발간된 잡지들이 빛으로 가득 찬 인상적인 내부공간이 표지모델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공간적 고민보다는 형태에 집중하거나 평면적 해결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김중업, 김수근 선생 등이 기틀을 잡은 건축계에서, 그 다음 세대의 선생들에게 약간의 원망이 있다. 그 분들의 헌신은 인정하지만, 시대를 반영하는 건축적 판단기준이 우리 사회의 판단기준과 부합, 발전하는 대안을 작품으로 제시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의 형편없음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건축인들이 그분들과 같이 작업하고 책을 보고 답사를 하며 건축물을 만드는 시간적, 물리적, 철학적, 사회적 활동을 기준으로 삼고, 건축의 꿈을 키워나갔으니 일정 책임이 있으리라.

“준공한 후 건축주와 항상 사이가 좋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건축사를 가끔 본다. 건축에 대한 시각이 잘못되었다. 주택이든 상가든 믿고 돈을 지불한 건축주의 삶에 대한 이해 없이 건축을 미학과 자신의 건축적 경험만으로 이기적으로 강요했을 뿐, 보다 나은 공간이 건축주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려 없이 설계비로 투덜거리곤 한다. 우리가 설계비만큼의 고민의 무게를 느끼고 작업하고 있는지도 한번쯤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지?

왜 유명해지려 하는지 이해하지만, 조금 덜 유명해지더라도 독창성 높은 작품들이 많이 지어져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처럼 세계적 건축으로 발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좀 거칠어도 결국은 독창성 있는 건축이 건축계의 미래일 것이고, 그 건축이 높게 평가될 수 있도록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건축계를 지배하는 기존의 공통적 가치의 기준이 변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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