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흠은 영광사람으로 홍문관 정자(정9품)로 있었고, 최부는 이웃 나주가 고향으로 같은 부서의 응교(정4품)로 있었다. 이들은 함께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갔는데, 어느 날 송흠이 최부의 집을 찾았다. 서로 담소하던 중 최부가 물었다. “자네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는가?” 송흠이 역말을 타고 왔다고 하자, “나라에서 주는 역말은 그대의 집까지이고, 그대의 집에서 내 집에 오는 것은 사사걸음인데 어찌 역말을 타겠느냐.”며 질책하였다. 송흠은 황망하여 집까지 50여리를 말을 끌고 걸어왔다. ▶휴가가 끝나자 최부는 이를 조정에 상주하여 그를 파면시켰다. 송흠이 최부에게 하직인사를 하니 “그대 같이 젊은 사람은 이후에도 마땅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송흠은 이후 고을 수령이 되어 부임할 때도 자신과 부인 그리고 노모의 말만 사용하여 삼마태수란 별명을 얻었고, 수회에 걸쳐 청백리 표창을 받았다. ▶최부는 제주도에 경차관으로 갔다가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여 중국에 닿은 후, 머물며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한 ‘표해록’을 쓴 청백리로서 이 책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중국의 3대 기행서 중하나가 되었다. 그는 연산 조 때, “왕이 학문을 게을리 하고 놀이를 즐긴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다 종국에는 김종직 문하라는 이유로 참형을 당하였다. 참형 전 송흠이 여한을 묻자 ‘부모의 산소에 석물을 세우지 못하고 막내딸을 시집보내지 못한 것이 여한’이라 하였다. 송흠이 ‘이것은 내가 마땅히 받들어 주선하겠다.’약속하였다. 그 뒤 송흠은 전라 감사가 되어 묘소에 입석하고, 딸도 응교 김자수의 아들과 정혼하게 하였다. ▶두사람은 4년 선후배에 이웃동네 그리고 같은부서에 근무하는 인연이 있다. 그런데도 선배는 후배를 더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하여 자그마한 과실도 용서하지 않았고, 후배는 이를 거울삼아 청백리가 되었다. 선배의 질책에 노여워하여 앙갚음을 할 수도 있었으나 오히려 선배의 여한을 풀어주는 보은을 하였다. ▶지난 호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에는 건축사공제회감사를 시행함에 있어 자료 제출을 거부하여 제대로 된 감사가 어려웠다는 기사가 올랐다. 편집국장은 회장에 의해 임명되고, 회장은 공제회 이사장을 겸한다. 회장과 감사와 편집국장에게는 각자의 임무가 있다. 이들은 협회의 위원회 등에서 수년간 머리 맞대고 봉사해 왔지만 지금은 다른 처지에 있는 것이다. 지연이나 학연을 떠나서도 동류로서 친해질 수밖에 없는 선후배간이지만 선공후사(先公後私)로 행하였을 것이다. 모든 것은 결자해지이다. 오직 이로 인하여 그간 쌓아온 돈독한 정의가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 최부의 추상같은 공무집행과 이를 거울삼아 평생을 청백리로 살았으며 최부에게 보은한 송흠,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건축사협회의 이번 일에도 거울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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