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본 적이 없던 어린 시절,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에서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라면서 끝내 사랑하는 제롬을 떠나 죽고야마는 알리사는 연민을 다가왔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된 지금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성경 말씀은 실천하기 힘든 문장이 되어버렸다. ▲일찍이 노자는 ‘그릇은 속이 비워져야만 유용하고, 방은 창과 문이 있어야만 쓸모가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설파했다. 조선 영조 때 이만영의 ‘재물보’에는 ‘문은 어떤 장소를 출입할 수 있는 시설이며, 한 짝이면 호, 두 짝이면 문, 창은 건물의 눈이며 외호는 대문’이라 했는데, 실제 한옥에선 창과 문이 모호하다. 이는 지금도 학교 출신을 동문 또는 동창으로 부르는 것과 상통한다. ▲문에는 문짝이 없는 경우도 있다. 절 입구의 일주문은 ‘여기서부터 절의 경계’임을 알려 속세의 번뇌를 내려놓는 무문관이고, 효자, 효부, 열녀, 충신을 위한 정문은 가문뿐만 아니라 동네의 자랑거리이며, 사당과 능, 묘 앞의 홍살문은 주칠을 하여 권위의 상징으로 쓰였다. 또한 수원성곽의 화홍문과 같은 수문이나 수구문 그리고 객사문도 문짝이 없다. ▲종2품 이상이 타는 초헌을 위한 솟을대문은 권위의 상징이며 초가집의 사립문은 정겨움이 묻어난다. 필자의 고향집은 대문을 지나면 직각으로 꺾여 중문이 있다. 이는 중문에 들기 전에는 안채를 볼 수 없도록 배려와, 대문에서 부엌이 보이면 복이 나간다는 가옥풍수에 기인한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대문 중 삼문은 궁궐이나 종묘, 재실, 사당건축에 쓰였는데, 가운데문은 궁궐에선 왕의 출입문으로, 종묘와 재실에선 신도(神道)로 쓰였다. ▲궁궐과 성문은 홍예문을 만들고 문루를 세웠으며, 사찰은 문 위를 종루나 고루로 쓰는 중층문들도 있다. 임원경제지에는 주실에 따라 대문의 동서남북 위치를 달리한다했는데 이는 양택론의 길흉화복에 근거한 것이다. 대체로 대문은 널판으로 만들었는데 불탑 등에는 석판문을 쓰기도 한다. 암사동 신석기 시대 수혈주거지를 보면 출입구가 남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 옛날도 출입과 더불어 채광을 고려한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올6월 입주할 서울 마포의 주상복합아파트에는 일반분양자와 임대주민의 출입문과 승강기가 따로 설치되고, 임대주민은 편의시설도 이용할 수 없다고 한다. 정부의 숙고하지 않은 탁상행정과 건설사의 분양 우선주의, 소득격차에 따른 갈등이 빚어낸 현실이다. 민· 관 · 전문가는 물론 사회 각 분야에 걸친 공동연구와 노력으로 합일점을 찾아야 한다. 누구든 공동시설의 대문을 자유롭게 드나 들 수 있어야 진정한 복지국가이고 문화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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