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입들
- 정끝별


한 이불에 네 다리를 꽂지만 않았어도

서로 휘감기지도 엉키지도
그리 연한 속살이 쓸리지도 않았을 텐데

한솥밥에 내남없는 숟가락을
꽂지만 않았어도

서로에 물들지도 병들지도
그리 쉽게 행복에 항복하지도 않았을 텐데

한 핏줄에 제 빨대를 꽂지만 않았어도

목줄도 없이 묶인 채 서로에게 버려지지도
무덤에서조차 그리 무리 지어 눕지도
않았을 텐데

한 우리에 우리라는 희망을 꽂지만 않았어도

두부에 박힌 미꾸라지처럼 서로를 파고들지도
닫힌 지붕 아래
그리 푹푹 삶아지지도 않았을 텐데


-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정끝별 시집 / 문학동네 / 2019년
<법구경>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사랑하는 것들과 만나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것들과도 만나지 말라. 사랑하는 것들을 보지 못함도 괴로움이요,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봄도 괴로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나서 괴로워 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서 또 괴로워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후회한다. ~(하지)만 않았어도 ~(했)을 텐데, 하고. 그러나 이 시는 그 후회가 마치 당당한 인간 선언처럼 들린다. 그게 우리야. 너고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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