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 김재룡


문풍지가 부르르 떨면서 호얏불이 파득거렸다. 삿갓봉 들머리에서부터 들판을 가로지르며 승냥이 울음소리가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안방 화로 냄비에는 무가 자작이며 푹 물러갔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함흥할머니가 매일 저녁 올려놓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돌아오지 않은 사랑방에서 어린 삼촌과, 고모, 사촌 누이들과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웠다. 아버지가 김장간에서 동치미 한 바가지를 퍼오면 어머니는 도토리묵을 무쳤다. 그날 밤 사랑채 흙벽이 뚫리고 두 섬의 고추 가마니가 사라졌다. 고개를 넘어 신작로로 이어지는 눈길에 불쌍한 도둑은 드문드문 선혈처럼 붉은 고추와 발자국을 남겼다. 그해 겨울 미끄덩거리는 묵처럼 수십 년의 세월이 성긴 앞머리와 손등을 덮은 주름살 사이로 빠져나갔다.
 

-『개망초 연대기』김재룡 시집 / 달아실 / 2019년

시에 있어서 서사는 웅숭깊은 서정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자칫 사실의 전달에 그칠 수 있다. 서사가 시가 되려면 그 내용이 이미 시인 자신의 몸에 중독처럼 퍼져있어야 한다. 그래야 묘사를 넘어서는 시의 그 불가능한 삶이 펼쳐질 수 있다. 이 시집 『개망초 연대기』에는 우리의 현대사가 한 개인의 역사 안에서 오롯이 펼쳐지고 있다. 아울러 그것이 한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임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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