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에 남도(진도, 해남, 강진) 여행을 했다.
가는 길에 불갑사에 들러 혹시 꽃무릇이 아직 남아 있을까 기대했는데 꽃은 지고 꽃대만 패잔병처럼 곳곳에 널브러져 있어 못내 아쉬웠다. 해질녘에 겨우 진도 ‘운림산방’에 도착하여 몸과 마음이 분주한 가운데서도 곳곳에 배어 있는 선인의 아취(雅趣)를 느껴보니 좋았다. 특히 운림산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연못과 정원은 저녁의 적막함이 주는 고요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연휴라서 숙소를 잡기가 어려워 할 수 없이 진도읍에 있는 모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어디서 할까 망설이다 어느 과일가게에 불쑥 들어가 이 지역 음식을 잘하는 식당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50대 초반의 주인여자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길 건너 저쪽에 있는 약국 앞에서 우측으로 들어가 골목길 안에 ‘광복식당’ 이나 ‘사랑방식당’을 가라고 했다. 나는 처음 보는 외지인에게 나름 괜찮은 식당을 소개시켜주려고 이렇게 진지하고 성실하게 말해 주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골목 안에서 어렵게 찾은 두 곳 모두 그 지역 손님으로 붐볐다. 한 곳은 식사 손님은 받지 않는다 했고 다른 한 곳은 연휴가 계속되어 음식 재료가 동이 났다고 했다. 내 잘못은 아닌데 괜히 과일가게 주인에게 미안했다.
이튿날 ‘세방낙조’를 시작으로 진도 남부와 동부해안을 일주하며 진도의 풍광을 감상하고 해남 ‘윤선도 유적지’를 거쳐 오후 늦게 강진 ‘다산초당’에 도착했다. 다산초당을 둘러보고 만덕리마을에 내려 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다른 곳에 숙소를 정하기도 뭣해서 마침 한옥민박집이 있어 알아보니 다행히 빈방이 있었고 값도 저렴했다. 아침에 일어나 한옥을 둘러보았다. 집은 일자(一字)로 길었는데 방 앞 툇마루에 걸터앉아 정원을 바라보는 느낌이 좋았다.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을 하려고 짐을 챙겨 나오는데 어제 밤늦도록 닭을 삶아 먹으며 떠들썩했던 50대 후반은 족히 되었을 남․여 일행 6명을 만났다. 그 중 한 여자가 정원에 있는 감나무의 감을 나무 막대기로 따서 먹으며 일행에게 감을 따자고 권하는데 몇 개 남지 않은 감을 모두 따버릴 기세였다. 그냥 출발하려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그들에게 “감이 있는 풍경이 좋지 않은가요? 다 같이 보면서 가을의 정취를 느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정중히 말했다. 일순 뜨악해서 나를 보는 그들을 외면한 채 나는 남아 있는 감이 한 사람의 재밋거리로 의미 없이 사라지기보다는 가을 내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다가 까치밥이 되기를 바라며 다음 목적지인 ‘소록도’로 향했다.
옛 속설에 ‘대추를 보고 안 먹으면 늙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아마 대추가 노화를 방지하고 강장, 피로회복에 좋은데서 기인한듯하나 나는 한편으로 나무 하나에 작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니 ‘내 것이 아니더라도 하나쯤은 부담 없이 따먹어도 좋다’는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가을의 낭만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 낭만도 사라져 농가에 피해를 줄 정도로 각종 농작물에 손을 대는 경우가 많아서 대추 하나 따기도 눈치가 보인다.
내 눈에 비친 다른 사람의 모습,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내 모습. 우리의 모습들이 서로서로의 거울이 되어 우리들을 비춘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며 잠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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