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 건설공의 역할 다대
G2로 부상한 중국 위상
고구려 고토 회복의 기반은
이들에게 정체성 심어주는 일
건축계도 나서야


며칠 전부터 한중수교 25주년을 맞아 양국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 중국은 수교할 때의 못살고 낙후된 나라가 아니라 미국과 다투는 G2 국가인데, 정치지도자들은 사드반대를 군사적인 단순논리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중국은 누천년 우리와 이웃하여 살아왔다. 고구려는 한 때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기도 하였지만 인구와 영토에서 열세인 우리는 대부분의 세월을 그들의 눈치 속에 조공을 받치면서 평화와 독립을 유지해 왔다. 그들을 우습게보기 시작한 것은 한중수교 이후이며 이제 그러한 시대는 사반세기 만에 막을 내리고 그 옛날 눈치 보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다.
때마침 한중수교 25주년이 되던 지난 26일 꾸준히 중국동포를 돕던 ‘좋은학교만들기 학부모모임’의 ‘2017 중국동포학부모 청소년을 위한 한국역사유적 체험 프로그램’에 초청강사가 되어 창덕궁과 독립기념관을 학생과 학부모 40여 명과 함께 하였다. 한 달 전 필자의 졸저 ‘한옥건축학개론과 시로 지은 집’을 읽어 본 관계자의 부탁에 당황하였으나, 감리현장을 갈 때마다 마주치는 중국동포들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떠올라 일단 승낙하였다. 1년에 집을 서너 채 씩 짓는 현장대리인의 말로는 철근콘크리트공의 60%, 목수의 40%가 중국동포라 한다. 6시30분에 와서 3시30분까지 일하는데 그들에게 아침, 참, 점심 주고 일당은 최하15만원에서 25만원까지 계산해 준다고 한다. 외국인이 과반을 점령한지 오래인 건설현장, 88만원 세대라면서 자조하고 ‘헬 조선’을 외치는 젊은이들은 미국에서 미장공의 임금이 제일 비싸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참여한 중국동포들은 체한 기간이 10년 이상으로 자리를 잡은 듯하였고, 30-40대가 대부분이었다. 학부모들은 자영업을 하기도 하고 아버지는 건설기술자, 엄마는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중국인으로 교육을 받았기에 ‘한국말을 하는 중국인’이란 정체성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었다. 이는 필자가 1996년 연변일대를 돌아볼 때 만난 중국동포들의 ‘나는 중국에 사는 조선인’이란 생각과 판이한 것이었다. 그에 비하여 초등생들 중에는 중국어를 아예 못하는 학생들도 많았으며, 한국인과 중국인의 개념이 특별히 형성되어 있지 않음을 보았다.
자연친화적인 창덕궁과 비원에서는 중국 자금성과의 차이점을, 독립기념관에서는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전투’를 설명하면서, 패전에 대한 복수로 간도 조선인 3,700여 명을 학살한 일제의 만행을 설명하였다. 또한 여러분의 선조할아버지는 분명히 독립군자금을 얼마라도 내고, 독립군에게 주먹밥이라도 해준 분들일 것이니 훈 포장이 없더라도 자부심을 가지라고 하였다. 또 중국인이 감히 생각도 못한 안중근,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서 한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한국은 오백년, 천년의 왕조를 가졌지만 중국은 300년 왕조조차 드물다. 수많은 주변의 이민족들이 중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런 중국이 분열을 시작하는 날, 만주의 동북삼성 옛 고구려 땅은 조선족들이 한국을 기리면서 기거해야 우리의 땅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조선족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고 친절을 다하는 것은 백년대계의 일이며 국가가 나서야 할 중대업무이다. 작은 민간단체의 이 조촐한 시작에 박수를 보내며 건축계도 십시일반 도와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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