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느끼며 배우는 것들
한번 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나고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스포츠센터나 자전거동호회의 멤버도 아니고 조깅도 못하는 게으름뱅이에게 유일한 운동은 전철역까지 걷기이다. 올림픽아파트에 30여 년을 살고 있기에 협회에 갈 일이 있으면 오금역 까지 20분을 걷고, 회사에 갈 때는 올림픽 역을 제껴 두고 둔촌역 까지 한 정거장을 걷는다. 이런 걷기의 재미가 가장 쏠쏠한 곳은 잠실 쪽을 다녀올 때이다. 몽촌토성역 계단을 빠져나와 김중업 선생의 ‘올림픽 평화의 문’을 지나면 몽촌토성 아랫길, 윗길, 중앙로 등 10개 이상의 산책코스를 마음대로 골라 집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 봄 성내천변의 개나리와 벚꽃도 일품이며 아름답지 않은 코스가 없지만 6월의 코스는 단연 남쪽 대로변의 보도로서, 만개한 넝쿨장미가 붉은 색깔로 유혹하기 때문이다. 유월의 첫날, 이 길을 걸으며 이 첨예한 시대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이해인 수녀의 “유월의 장미”를 되뇌어 본다.
하늘은 고요하고 / 땅은 향기롭고 / 마음은 뜨겁다 / 6월의 장미가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중략> 삶의 길에서 / 가장 가까운 이들이 / 사랑의 이름으로 /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고 / 누구를 한번 씩 용서할 적마다 /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 6월의 넝쿨장미들이 / 해 아래 나를 따라오며 / 자꾸만 말을 건네옵니다 <하략>
중국에서는 모란이나 작약같이 화려한 꽃을 제일로 쳤으나 백화암이란 화원을 경영한 영정조 때 사람 유박의 화훼전문서인 화목품계에 보면, 우리나라는 부(富)를 뜻하는 모란 작약은 둘째이고 운치와 절개를 뜻하는 매화 국화 등을 제일로 쳤으며 장미는 9품 중 5품계에 넣었다. BC 3,000년 경 중동지역에서 재배되기 시작했고 로마시대에는 향수로 쓰였던 장미는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 이미 그 기록이 있으며 방향제는 물론 장미꽃으로 화전을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도 동국세시기에 있다. 장미는 서구세계에서 최고의 꽃이 되었고 지금은 그 종류만 25,000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 만큼 꽃말도 다양하여 붉은 장미는 사랑과 열정, 주황은 첫사랑, 노랑은 질투, 녹색은 천상에만 존재하는 고귀한 사랑, 보라색은 영원한 사랑, 분홍은 행복한 사랑, 백장미는 존경과 순결 그리고 흑장미는 당신은 영원한 나의 것 등 사랑이란 단어를 기본으로 하여 매우 다양하다.
남3문의 한성백제박물관을 지나다 보니, 붉은 장미와 백장미를 각기 가문의 상징으로 삼았던 영국 왕자들의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장미전쟁이 생각나고, 공연장이 즐비한 남2문 앞에 선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Andrey Voznesensky)가 그루지아의 가난한 화가가 유명 여배우를 사랑하는 이야기를 담은 시를 노래한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를 흥얼거려본다. 걷다보니 수십 종의 장미들이 자태를 뽐내는 공원 끝자락의 장미광장이다. 화려한 꽃들 속에서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새긴 차디 찬 화강석 시비가 반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곱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젖지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 바람과 비가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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