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는데 친구의 아들이 건축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어느 날 건대입구 근처에서 걱정 가득한 친구와 새내기 대학생인 아들과 만남을 가졌다. 몇 년 전 건축학과 여학생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건축학과에 지원한 동기와 졸업 후에 어떤 분야를 희망하는지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십년 후의 본인 모습을 상상하고 나름대로 계획을 만들어서 다음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대학과정 중에 준비해야 할 기본적인 것들과 다양한 업역이 있다는 조언을 해주었지만 삼십여 년 경험의 노하우를 그가 얼마나 마음에 담을지 답안지 적힌 시험문제를 읽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선배님들이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면 지금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사무실을 시작해서야 건축사사무소가 서비스업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직원으로 근무할 때는 연차에 해당하는 일을 하고 급여를 받으면서 근로자와 예술가를 넘나들었는데 대표가 되고 보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계획해서 준공까지 책임지는 서비스를 해야 했다. 야근 철야 하면서 종합예술업무를 경험하다보니 어떤 프로젝트라도 금방 적응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갖추게 됐는데 수주나 영업은 참 부담스런 분야라서 차라리 봉사활동이라면 열심히 했던 내가, 건축주를 만나서 건축주의 요구에 부합하는 결과물을 도출하고도 용역비 청구할 때가 되면 참으로 당당하지 못하게 미적거리고 있었다. 이상적인 작품에만 매진했던 학부시절에 작품을 건축주에게 마케팅하고 적절한 대가를 받는 과정을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건축사협회에 뒤늦게 가입해서 ‘서울시건축사회 CMRM연구회’ 활동을 했는데 2014년 11월에 세미나 책자를 만들게 됐다. ‘건축사 업무영역의 변화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를 정리하다보니 건축사법과 국토부 고시에 있는 업무내용이 설계, 감리, 조사, 감정 외에도 연구, 지구단위계획, 경관, 기획, 자문, 인테리어, 리모델링, CM, VE, 유지관리 등 다양했고 확장 가능한 업무로는 플랜트 전문, 학교 대수선, 자치구 도시재생, 서비스디자인, 종합건축물관리, 석면감리, BIM, 인증관련업무 등이 있었다. 대학 강의 과정에 건축 업역을 포함해서 직업선택의 폭을 넓히고 필요한 과정을 미리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건축프로젝트가 있어야 구조, 기계전기, 토목, 조경 등 협력업체 업무도 있음을 홍보하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컨트롤하는 비용을 제대로 산정 받아야 한다.
의사는 병자들만 상대해서 고달프고 건축사는 행복한 건축주를 상대해서 좋다고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병자들은 의사를 신뢰하고 의지하지만 건축주는 건축사의 ‘갑’이다. 요즘 설계비가 비싸다는 말을 들으면 이런 말을 하게 된다. 건축학과 학생이 5년간 배워서 졸업하고 갈 곳이 있어야 하는데, 건축사사무소가 운영 가능해야 신입직원을 채용하고 경험이 쌓여서 역량 있는 건축사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노력이 마른행주 되어 비틀리면 순환이 될 수가 없어 모두 열악해지고야 마는 사회적 파급을 생각해 달라.
우리의 노력이 ‘도면 몇 장’으로 폄하되기도 하고 마케팅에 능숙한 비전문가들과 협력업체들이 좌절을 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사는 ‘의식주’라는 인간생활의 세 가지 기본요소에 관련되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어디에서든지 필요한 분야이고 재능기부하기 좋아서 자기만족의 기쁨도 충만할 것이다. 자연에 녹아있는 자연을 위하는 건축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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