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단풍보다 더 빛나는 우리의 문화유산 한글을
내 가슴에 품은 아이처럼 사랑하자,
깊어가는 가을에

단풍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가을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매년 맞는 가을이요, 단풍이건만 올 해는 무더위를 이겨내고 내 앞에 서 있는 단풍이 더 사랑스럽고 대견하다.
며칠 전 제570회 한글날이 조용히 지나갔다. 세종실록에 보면 한글은 1446년(세종29년) 음력 9월 상순에 반포 되었다. 한글날은 1990년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가 2013년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글을 만든 이와 만든 시기가 분명한 글은 세상에 오직 하나, 한글뿐이라는데 그 한글은 오늘날 홀대를 받고 있다.
1970년 한글전용 정책이 시행되었고 2005년 제정된 ‘국어기본법’은 교과서와 공문서를 한글로만 쓰도록 했다. 일부에서는 이 국어기본법이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학생들의 자기결정권을 침해 한다하여 위헌소송을 했으나 1996년 헌법재판소는 ‘각하’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올 해 또 위헌소송을 당하여 한글이 또 다시 법정에 서게 되었다. 한편 한자어로 된 우리말이 적지 않아서 한글만으로 한국어를 온전히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요즘처럼 한글이 수난 받고 외래어가 범람하는 때도 없었다.
우리말을 어법에 맞지 않게 쓰거나 외래어의 남용, 오용은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방송은 언어 순화 및 바른말 보급에 앞장 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에서는 사전에도 없는 말, 어법에 맞지도 않고 듣기에도 거북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얼마 전 TV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방송사의 ‘뇌섹시대 - 문제적 남자’라는 방송 제목을 보았다. ‘뇌섹’이라는 말도 낯설거니와 ‘문제적’이라는 말이 이상하여 어법에 맞는지 「국립국어원」에 문의 했더니 일반적으로 명사에는 적(的)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는 다소 성의 없는 답만 들었다. 뭔가 개운치 않아 충북대학교 국어연구원에 알아보니 명사라고 해서 무조건 ‘~적’ 이라고 쓰는 것은 아니며 이 경우 문제적이라는 말은 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다.
또 여자에게 섹시(sexy)하다고 하면 그 뜻으로 볼 때 다분히 성희롱적인 말인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새 칭찬의 말로 변해버려 툭하면 섹시 타령이다. 어린애들이 귀엽게 춤을 춰도 섹시댄스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는다. 섹시에서 파생된 ‘뇌섹남’,‘뇌섹녀’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외에도 폭풍흡입, 안구정화 같은 생소한 말에다가 런칭, 콜라보, 에코 등의 외래어 그리고 방송의 제목이 조금만 길어도 줄여 써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정도로 한글 파괴는 심각하다. 2011년 방영된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비화를 담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뿌나’로 줄이자 이 드라마의 제목만은 줄이지 말자는 여론도 있었다.
1970년대는 예비고사를 거쳐 대학별로 치루는 본 고사가 있었다. 그 때 내가 지원한 학교의 국어시험에 ‘외래어가 남용되는 이유’를 A3용지 한 장에 쓰라는 주관식 문제가 있었다. 내 기억에 나는 ‘자기의 유식함을 드러내려는 허세, 그리고 우리말로 바꿔서 말 하려 해도 마땅한 우리말이 없는 현실’을 말했던 것 같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외래어의 남용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다.
우리말의 멋에 흠뻑 젖어 청년 시절 줄줄 외웠던 정철의 사미인곡,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다시 꺼내어 읊어야겠다. 화려한 단풍보다 더 빛나는 우리의 문화유산 한글을 내 가슴에 품은 아이처럼 사랑하자, 깊어가는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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