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혜은

우리는 약속했다. 손가락이 있다면 지켜.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매일 승용차를 타고 손을 흔들었다. 다섯 손가락엔 우여곡절이 그득했다. 붉은 마음을 들고 잘 익은 과실을 따듯 슬픔을 수확하던 계절. 종이에 적힌 이름에는 멋없이 멍이 들었다. 명함 좀 주고 가세요. 명함이 없어 피 묻은 손가락을 짜내며 모든 게 처음인 것처럼 나를 소개하고, 소문을 건네던 날들이 있었다. 문밖으로 건너온 당신의 신분이 궁금한 것은 나의 신변이 불안하기 때문이겠죠. 내 몸 어딘가에서 피가 솟으면 붉은 입술이 묻은 거예요. 나는 나처럼 굴었고, 입속에서 자신을 소개했다고. 엄마는, 나는, 우리는 명함을 새겼다. 다섯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버리지 않기로 해. 버려지지 않기로 해.

-『신부수첩』조혜은 시집 중에서
문예중앙시선 / 2016

명함을 받으면 나중에 꼭 한 번은 그 사람에게 전화해 보는 의뢰인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명함을 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이제까지 지내면서 받은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은 수북한 명함 뭉치들이 새롭게 보였다. 한 번도 그 명함에 적힌 주소나 전화로 연락하지 않았다.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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