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편해야 한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맞게 입어야 예의다.

연록의 잎새들이 실바람에 나풀거리며 꽃보다 아름답게 빛나던 봄날이 엊그제 같은데 숲은 짙은 초록으로 변하고 암록색 잎 뒤에 숨은 초록 감(柿)이 몸집 불리는 여름이다. 계절이 이쯤 되면 사계절 아무 때나 입을 수 있는 청바지도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어서 입기가 불편해
진다.
80년대 초, 사회 초년시절 내가 다닌 설계사무소는 작지 않은 규모에다가 조직이나 시스템도 그 크기에 걸맞게 짜임새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입사하면 우선 글씨연습과 선 긋기를 하였고 그것이 끝나면 도면 그리는 법을 배웠다. ‘드로잉 매뉴얼’은 책으로 되어 있었는데 도면의 간결함과 도면간의 상호관련성을 요체로 하고 있었다. 그 때 배우고 익힌 드로잉 매뉴얼은 내가 개설한 사무소에도 철저히 지켜왔다. 하루는 결재를 받을 일이 있어서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
신 분 중의 한 분인 B 임원실에 들어갔는데 내가 입은 청바지를 힐끗 보시더니 “오늘 야유회 가나?” 하신다. 무심결에 “오늘 야유회 없는데요”라고 말씀드리는 순간 아차! 싶었다. 복장에 대해 특별한 규정은 없었으나 주로 정장 차림 아니면 깔끔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사무소 분위기인지라 나의 이런 자유스러운 복장은 다소 튈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스티브잡스, 빌게이츠 등 거대 IT업체의 CEO들이 청바지를 입고 신제품 발표회를 할 정도로 이제는 캐주얼 복장이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느낌을 준다는 분위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 제69회 칸영화제가 있었는데 남자는 검은색 정장에 나비넥타이와 구두, 여자는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고 입장하는 드레스 코드(Dress code)에 맞서 배우 줄리아 로버츠는 맨발로,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주연배우 수잔 서랜든은 굽 낮은 신발과 턱시도를 입고 입장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하여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이 드레스 코드는 배우뿐만 아니라 일반관객, 기자에게까지 적용되어 이를 어길 경우 입장이 저지되는 것이 오랜 관행이라 한다. 그런데 작년 칸 영화제 당시 하이힐을 신지 않은 여성들이 입장을 거부당해 여배우들이 성차별이라며 반발한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엄격한 드레스 코드의 적용으로 논란이 된 사례가 있었다. 어느 유명 호텔 레스토랑에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씨가 입장을 제지당했는데 그 이유는 한복이 부피감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후에 호텔 대표가 직접 이혜순씨에게 사과를 하고 한복을 입은 사람도 입장 가능하게 바꿔 그 일은 일단락이 되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있다. 옷은 신분과 직업을 나타내 주기도 하고 상품의 포장지와도 같아서 나를 더 돋보이게 하기도 한다. 드레스 코드는 특정행사에 요구되는 복장으로 참여하는 사람 스스로 격식을 차리고 권위를 높이자는데 그 뜻이 있지만 때로는 지나친 드레스 코드가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더라도 요즘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을 가게 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복장을 종종 볼 수 있다. T 셔츠나 등산복 차림으로 오는 사람들이다. 복장을 갖추려다 못 오는 것 보다는 이런 복장으로라도 참석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정해진 드레스 코드가 없다 할지라도 그 시대 그 사회에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복장은 분명히 있다.
옷은 편해야 한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맞게 입어야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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