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인간이 공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노력 할 때다.
인공지능이 축복이냐 재앙이냐는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렸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나이에 바둑을 배웠다. 아버지께서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에게 바둑을 배우려고 다리가 달린 바둑판을 목공소에서 만드셨는데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께서 바둑은 배우지 않고 친구와 술만 드신 것 같다. 주인을 잃은 바둑판은 자연스럽게 우리 형제들 차지가 되었고 나는 형들의 어깨 너머로 바둑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윗집에 나보다 20여살 많은 4촌 형님이 계셨는데 바둑을 잘 두셨다. 가끔 4촌 형님께 바둑을 청했지만 그냥은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서로 합의한 것이 심부름 하나를 해 주면 한 판의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심부름은, 그 시절 동네에는 전화기가 없었던 때라 옆 마을에 말(言)을 전달하거나 여름날 수 100미터 떨어진 밭에 시원한 물 주전자를 들고 가서 일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이었다.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어서 한 수 배운다는 기쁨에 힘든 줄 모르고 나는 듯이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실력이 안 되니 내 바둑돌은 툭하면 죽었고 형님은 죽은 내 바둑돌을 판에서 들어내면서 약을 살살 올려 징징 울면서 바둑을 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25점 접바둑으로 시작한 형님과의 대결은 10여년이 지난 대학시절에 겨우 대등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렵게 배웠기에 바둑을 사랑하고 바둑판 까지도 소중히 생각하여 신혼 초에 장만한 평범한 바둑판이지만 항상 덮개를 씌어 놓고 그 위에는 아무 것도 올려놓지 않고 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게임 바둑에서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을 대표한 이세돌 9단을 4:1로 이겼다. 인공지능은 탁월한 계산능력으로 인간의 직관과 추론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3연패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오늘의 패배는 이세돌이 패한 것이지 인간이 패한 것은 아니다’라고 이세돌 어록에 길이 남을 만한 말을 하여 우리를 감동 시켰다.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 속에서도 패배를 솔직히 시인하는 승부사다운 의연함은 패배를 인정하는 사람이 저렇게 당당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런 가운데 힘겹게 이뤄낸 1승은 자칫 우울할 수 있었던 1주간의 대결을 바둑축제로 승화시켰는데 이것은 이세돌의 공이다.
바둑은 본래 손으로 나누는 대화, 즉 ‘수담(手談)’이라고 하여 풍류와 멋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빠르고 정확한 계산으로 최적의 수를 찾아내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는 곧 바둑이 추구해 왔던 미학(美學), 즉 풍류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인간은 인공지능의 습격에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무섭게 발전하는데 인간은 그에 대한 대비가 안 되었다. 나는 인공지능 뒤에 숨은 인간의 탐욕을 경계한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공지능이 통제가 안 되어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지금까지의 질서에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노력할 때다. 인공지능이 축복이냐 재앙이냐는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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