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이콥스 주택 (Jacobs House I, 1936~37), 정원 쪽에서 본 외관 ⓒ김현섭

유럽 모더니즘이 ‘서양 근대건축사’의 숲을 이루는 중심축이었지만 대서양 건너 미국의 발전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언뜻만 보아도 미국 근대건축에 대한 유럽의 영향은 자명하나(대표적으로 1932년 뉴욕에서의 ‘근대건축국제전’이나 이후 그로피우스와 미스가 미국에서 벌인 활약상을 기억하자), 사실 따지고 보면 유럽의 모더니즘이 초기부터 미국의 자양분을 갖가지 섭취했음도 쉬이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1910년대 미국의 거대한 곡물창고 같은 실용주의 건물들은 독일의 그로피우스를 고무시켰고, 뉴욕의 도시 구조와 마천루는 이탈리아 미래파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 근대건축의 최고봉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가 유럽의 후배들에게 준 자극은 더 도드라진다. 특히 1910년 독일 바스무스 社에서 출판된 그의 포트폴리오는 영향력이 지대했고, 로테르담의 데스틸이나 베를린의 미스에게 전수된 ‘흐르는 공간’은 근대건축 개념의 정수였다. 이런 사실은 서양 근대건축의 큰 그림 가운데 라이트의 중요성을 재삼 확증해준다.

라이트의 건축은 우선 그가 내세운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이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이 말을 늦어도 전술한 1910년의 책자에서부터는 사용한 듯하며, 이후에도 그 개념을 계속 발전시킨다. 그에게 유기적 건축이란 기본적으로 건물이 자연과 하나로 통합돼 생명력을 발산하는 것으로, 일본의 전통주택이 그 지표였다. (그가 일본 목판화를 열렬히 수집했던 일이나 그 나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은 익히 알려진 사항이다.) 그러면서도 라이트 건축의 유기성은 대개가 (흔히 연상되는 곡선이나 비정형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기하학적 그리드에 근간해 공간의 성장과 분할을 능동적으로 진행시켰다. 이 같은 그리드 체계는 일본 주택의 다다미 모듈과 연관되기도 하고, 그가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프뢰벨 블록의 영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893년 아들러&설리반 사무실에서 독립한 라이트는 1959년 세상을 뜨기까지 6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고, 그 대다수는 개인주택이었다. 그의 긴 경력 가운데는 크게 두 시기가 두드러지는데, 첫째는 1900년대의 첫 10년에 해당하는 ‘프레리 주택(Prairie House)’ 시기로 이때 확립한 명성이 바스무스의 포트폴리오로 이어진 것이다. 둘째는 대공황 이후 1930년대 후반부터의 ‘유소니아 주택(Usonian House)’ 시기로서 그의 경력이 다시 꽃을 피운 때다. 이때의 시작은 대부호를 위한 낙수장(Fallingwater, 1935~39)의 건축과도 중첩되지만 이 불황기에 그가 천착했던 주거 유형은 미국의 일반 중산층을 겨냥한 소규모의 경제적 주택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한 ‘유소니아(Usonia)’라는 말은 ‘미국’에 대한 종래의 (‘United States’ 또는 ‘America’와 같은) 모호한 표현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주적으로 개혁된 새로운 미국 사회를 향한 그의 열망을 드러낸다. 결국 유소니아 주택은 그가 꿈꿨던 ‘브로드에이커’의 전원도시에 부합하는 단위 주호이자 전술했던 유기적 건축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점에 다름 아니다.

첫 번째 유소니아 주택은 젊은 저널리스트였던 허버트 제이콥스와 그의 가족을 위해 위스콘신에 지은 것으로, 이후 뒤따를 여러 주택들의 전범이 된다. 제이콥스 주택(Jacobs House I, 1936~37)에서 라이트가 가장 고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비용을 대폭 절감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삶을 반영하는 주거를 창조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그의 글을 가름컨대(Architectural Record, 1938.1) 해결책은 일단 기존 주택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히 생략하는 것으로, 평면 디자인의 측면과 크게 관련한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기술적인 요소도 중요한데, 라이트는 가급적 마름된 자재를 반입해 현장 시공의 비싼 노임을 줄이는 것과 난방·조명·위생의 설비를 통합해 단순화시키는 것을 강조했다. 이로써 도출된 결과는 124.5m2(37.7평) 면적의 단층집으로서 전체적으로는 L-자형 평면을 취한다. 이런 유형은 도로로부터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정원을 확보하기에 유리하며, 양 날개 공간의 기능적 분리에도 효과적이다. 즉, 한쪽 날개에는 넓은 거실이, 다른 한쪽에는 두 개의 침실과 하나의 서재가 자리하며, 두 날개가 교차하는 지점에 현관·욕실·부엌이 놓였다. 이전의 프레리 주택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도 밀도 높은 실내가 창조됐으며, 별도의 식당을 두지 않음으로 인한 식모 및 가부장적 식탁의 부재는 주거공간의 민주성마저도 암시한다. 그러한 민주적 공간의 가능성은 이 주택이 2*4피트 모듈의 단순 그리드를 채택한 데서도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프레리 주택이 근거했던, 다른 간격으로 규준선이 교호하는 타르탄(tartan) 그리드의 위계성을 탈피한 셈이기 때문이다.

▲ 유소니아 주택의 ‘보드 앤 바텐’ 벽 단면

한편, 유소니아의 경제적 구축을 위해 라이트가 확립한 기술적 방법 중에서는 ‘보드 앤 바텐(Board and Batten)’이라는 판자벽 시공법이 두드러진다. 그는 벽돌로 쌓는 최소한의 내력벽을 제외하고 모든 벽면을 유리창과 목재 판자벽으로 구성해 공간의 효율을 높였고 공기를 단축했다. 또, 판자벽에서 반복되는 나무 널의 수평선은 수직적 그리드로 작동함으로써 건물 각 부분의 높이를 중재하며, 여러 겹의 평지붕 레이어와 조응한다는 면에서도 뜻 깊다. 하지만 이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라이트의 신공법은 바로 바닥 난방이다. 스스로 ‘중력열(gravity heat)’이라 부른 이 난방법은 그가 우리 전통의 온돌에서 차용한 것으로서 서양 근대건축의 발전을 위한 한국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라이트가 1910년대 일본을 방문해 ‘한국방(Korean room)’을 경험하고 받은 인상에 대해서 자서전(1943) 등 몇몇 곳에 기록해뒀지만 이는 오랫동안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던 듯하며, 근래에야 조명되고 있다(拙稿, ‘The appearance of Korean architecture in the modern West’, ARQ, 2010.12). 바닥 난방을 통해 그는 거추장스럽던 방열기를 없앨 수 있음과 실내에 완전히 새로운 ‘기후’를 창조할 수 있음을 깨달았고, 결국 제이콥스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미국 최초로 한국 난방법을 시도해보지 않겠소?”

요컨대, 제이콥스 주택은 라이트가 유소니아의 꿈을 발진시킨 최초의 장이었다. 그 후 60여 채에 이르게 된 유소니아 주택은 제이콥스에서의 실험을 발판으로, 이를 반복, 변형, 확대해 나간다. 존 서전트(1976)는 이들을 다섯 유형으로 분류하기도 했는데, 공히 당시 미국의 ‘보통’ 가정이 목표할 만큼의 경제성을 갖췄고 근대적 민주사회의 이상도 내비쳤다. 그러한 폭넓은 적용 가능성이야말로 프레리에서 누리지 못한 유소니아만의 유기적 특성이리라. 비록 시공간의 간극이 작지 않지만, 제이콥스를 필두로 한 유소니아 주택들은 아파트를 벗어나 땅집으로의 귀환을 타진하는 현대 한국인들에게도 멀리서나마 반향을 준다 하겠다. 게다가 거기 우리의 온돌마저 적용됐다니 더 관심을 가져봄직 하지 않겠나.

▲ 제이콥스 주택 배치도
▲ 제이콥스 주택 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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