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면, 물 흐르듯 별 문제없이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건축물이 준공될 때까지 건축사를 괴롭히는(?) 프로젝트도 있다. 건축사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쟁의 소지가 생기기도 하지만, 때론 자신의 실수로 인해 문제가 생길 때도 있기 마련이다. 본지는 2011년부터 계약, 설계, 감리, 행정 등 업무과정에서 생겼던 건축사들의 사례를 게재하고, 이를 통해 후배건축사들에게 경종을 울려줄 ‘나의인생·나의작품 그리고 失手記’를 연재한다.

1994년 시작된 프로젝트, 2005년에나 준공돼
공사 맡은 건설사도 과도한 소송과정으로 부도나
10년의 기간, 직원들과 나 자신을 격려하며 버텨

건축사 누구에게나 가장 큰 약점이라면 누군가 다가와서 큰 일을 주겠다고 할 때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다가온 미지의 사람이 큰일을 줄 수 있다고 속삭일 때 여기에 현혹 될 건축사는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 1994년 어느 날 한사람이 찾아왔다. 쉽게 말해 브로커다. 일 소개해주고 구전을 받는 사람인데 번듯하게 생겼다. 첫마디에 큰 교회설계가 있는데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이미 J건축에서 계획안을 잡았지만 마음에 안 들어 새로운 설계자를 찾고 있노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본인이 여러 가지 큰 일들을 P건축 등에 소개해준 적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무실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고 했더니 내가 설계한 C교회를 가보고 소개받아 찾아왔다는 것이다. 건축주는 보지도 못하고 브로커부터 만난 것이다. 흥미 있다고 했더니 그제야 건축주인 목사를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계약이 성사되면 얼마를 달라고 하는 것이다. 당시에 연면적이 8,500평이나 되는 교회이므로 상당히 큰 규모라 당시 내가 취급하던 설계규모의 두 배 이상을 상회하는 것으로 갑자기 나는 흥분한 셈이다.

소개받은 교회목사는 젊기도 했지만 모든 일을 직접 담당하는 모습에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큰일에 현혹된 나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혹시 이단목사는 아닌가 하는 의심에 늘 사무실에 오던 목사에게 문의해보았다. 혹시나 이단 목사인줄 모르고 설계했다고 나쁜 소문이나 나서 다른 일들까지 못하는 영향을 받을까 해서였다. 다행스럽게 소문은 안 좋지만 아직 이단으로 정해지지는 않았다고 해서 계획을 진행하였다.

대지는 바로 전철역에 이웃하고 있고 큰 도로에서 면해있는 요지였다. 건축주 목사를 만났을 때 J건축의 계획안을 보게 되었다. 이미 한사무실을 거쳐 간 프로젝트인데 이때 나는 위험신호를 보지 못했다. 교통으로 말하면 빨간불이 이미 한번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는 셈이다. 나는 이 번듯한 대지에 괄목할만한 교회를 지어 건축계에 보란 듯이 뽐내고 싶은 기분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실수는 계약 없이 계속 계획안을 진행시킨 것이다. 순진한 사무실직원들이 계약 없이 계속 진행되는 이 일에 얼마나 불안했을까 생각해본다. 의욕은 얼마나 충천했는지 지상15층이나 되는 큰 교회를 오십 분지 일 모형으로 까지 만들어 의욕을 보인 것이다. 수용인원 무려 오천 명, 그리고 중간에 기둥 없는 무주공간의 스팬이 무려 45미터나 되는, 지금생각해도 아찔한 계획이다. 더구나 당시에 삼풍사건이 터진 후라 대구경공간에 심사위원들 신경이 예민해있던 때라 시청심의에서 세 번째에 겨우 통과되었다.

세 번째 실수는 계약금이 작은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설계계약서 말미에 있는 지체상금규정이다. 현재도 모든 설계계약서 상에는 지체상금규정이 존재한다. 그 규정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특약사항이라고 첨가된 계약서가 문제인데 시청의 정당한 심의절차 때문에 늦어진 설계기간의 지체를 그대로 적용하면 엄청난 지체상금이 발생하는데 이를 차후 설계변경설계를 해주는 조건과 상쇄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당시에도 구변 좋은 건축주의 설계변경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덜컥 도장을 찍고 만 것이다.

결국 1994년에 시작된 이일은 2005년에나 준공되어 무려 십년을 괴롭힌 내일생일대의 나쁜 기억에 속하는 일이 되었다. 이 일 시작 후 몇 년 후에 지방법원의 조정위원을 맡게 되었는데 이유는 이목사가 왠만한 일들은 직접 소송으로 몰아가고 소장은 직접 쓸 정도로 능수능란한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도 법에 대해 익숙해져야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10여 년 째 법원에서 조정을 하면서 왜 모든 분야에 법조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알게 되고 나도 매사에 법적인 마인드를 갖게 된 것이다. 한번 잘못 도장 찍은 계약서는 건물이 준공된 후 법원에서 끝장이 났는데 나는 결국 감리도 해주고 거금 삼천만원이라는 돈을 거꾸로 물어주고 일이 종료되었다. 재판정에서 만난 그는 또 어디서 악질변호사를 구해서 소송에 임했는데 그 역시 다른 일로 구속경험이 있는 변호사인데 다만 인상적인 것은 그 목사를 위해 아주 악착같이 변호에 임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 변호사측이 물렁물렁해서 재대로 방어를 못 받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법원은 억울한 자를 구해주는 곳이 아니라 계약을 잘한 사람을 보호해 주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지체상금이 문제가 된 것은 첫 번 시청심의가 한 번에 통과되지 못한 날수와 당시에 각 구청마다 도시계획을 따로 입안하여 중심 상업지구를 각 구마다 지역을 정하면서 이지역이 또 교회를 지을 수 없는 곳으로 되어 시청심의에서 두 번이나 거부당한 것 때문에도 지체되었지만 이제는 지역지구가 변경되어 허가를 접수할 수 없는 지역으로 변경된 것이다.

그러나 한번 교회를 짓기로 목표를 정한 건축주는 집요하게 무리하게 추진하여 허가를 받아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방송에서 이 건이 그대로 뉴스에 터져 나왔는데, 당시 구청장도 구속되고 건축주도 구속되었다. 이 일후에도 다른 건으로 한 번 더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만큼 집요하고 대단한 사람이다.

그 후에 시공과정에서도 세 개의 건설사가 이 건에 휘말려 손해를 보았는데 한 결 같이 건축주가 사용한 방법은 지체상금의 악용이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뛰어들어 이 공사를 마무리한 건설사도 공사비 잔금 40여 억을 지체상금규정으로 못 받아 소송에까지 이르렀는데 결국 고등법원 판결에서 이겨 돈은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지친 나머지 부도가 나버렸다. 이런 지독한 건축주를 두 번 만나면 아마도 버틸 시공회사도 건축사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버텼다. 계속 직원들과 나 자신을 격려하면서 말이다. 실적하나 쌓는 것으로 위안을 삼자고 말이다. 그리고 대경간의 구조이지만 구조·감리의 지속적인 감리로 무사히 잘 끝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악연은 감리는 우리가 못하고 다른 회사에서 맡았는데 감리자 역시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축사였다.

사소한 것에도 시비를 걸고 다가오는 그의 얼굴은 지옥에서나 볼 수 있는 ‘야차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마음껏 기술한 것은 익명으로 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 일후에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10년의 애증이 교차한 이 건물은 내가 한 번도 가고 싶지 않은 건물이 되어 지금도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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