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설계시장 외국 설계업체들의 ‘봉’으로 인식될 우려
기술적인 협력업체 부담 없이 기획·디자인비 많게는 50%까지 가져가
실제 사업 주관은 국내 건축사사무소 몫, 외국 건축사만 좋은 일 시켜

국내 전 분야 한류 표방함에도 건축분야 외국사 선호 경도, 사대주의 만연
공정경쟁 통해 업계 스스로 노력, 외국사 경쟁서 이길 수 있도록 해야

국내 주요 건축프로젝트 설계시장은 외국 설계업체의 독무대나 다름없다. 자칭 ‘랜드마크’라 칭하는 사업들이 많다 보니 외국 건축사사무소 및 스타건축사를 찾는 일이 공공, 민간 건축물 할 것 없이 많아진 게 사실이다.

작년만 해도 압구정아파트지구 특별계획구역3 재건축, 서리풀 개방형수장고, 성수동 삼표부지 글로벌업무지구 개발사업에서 외국 유명 설계업체가 컨소시엄 전면에 나서거나 설계공모에 당선, 설계를 맡게 됐다. 설계비도 수십, 수백억 규모. 이유는 해외 유명 건축사 명성을 빌려 분양·임대, 마케팅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다. 일반적으로 해외 건축사사무소는 기획·계획설계를 맡고, 현행법상 외국 건축사는 국내 건축사와 협업이 의무화돼 있기 때문에 국내 건축사사무소는 실시설계 등을 담당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설계시장이 마케팅 차원에서 외국 설계업체 이름을 붙이길 원하는 상황이라, 이런 흐름에 편승해 자칫 한국 설계시장이 외국 설계업체들의 ‘봉’으로 인식될 우려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 대형 건축사사무소 관계자는 “마케팅 차원에서 외국사를 전면에 내세우기를 국내 시장에서 원한다는 걸 외국사들도 알기 때문에, 간판을 내세워 ‘아니면 말고’ 식으로 너도나도 거액의 설계비를 부르는 상황”이라며 “기술적인 협력업체에 대한 부담 없이 전체 설계비에서 편하게 기획·디자인비를 가져가고, 실제 사업 주관은 국내 업체들이 수행하는 까닭에 외국사만 좋은 일을 시키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더더구나 최근 들어서는 당선업체를 뽑을 때 문호가 열려 있는 ‘경쟁 공모’ 방식보다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유명 외국 건축사나 회사를 지명해 기회를 주는 ‘지명공모’ 방식이 선호되는 형편이다. 이럴 경우 국내 업체에게는 참여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설계공모 과정에서부터 국내 건축사사무소를 배제한 채 프리츠커를 수상한 명망 있는 외국 건축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이 심화하면서 ‘디자인 사대주의’ 아니냐라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나오는 상황. 관계자들에 따르면, 유명 외국 건축사의 경우 전체 설계비에서 적게는 20%, 많게는 50%까지 로열티 명목으로 디자인비를 가져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초고층 설계를 비롯한 주요 건축프로젝트 대부분이 외국사 독무대가 돼버린 지 오래다. 국내 메인 대형사들이 일단 수주를 해야 하니 외국 명망 있는 건축사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든 점도 없지 않다”며 “국내 전 분야가 한류를 표방함에도 건축분야가 유독 외국사 선호에 경도되다 보니 국내사 입장에서는 경험을 쌓지 못해 경쟁력을 높일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력 있는 국내 건축사들을 외면하고, 외국 건축사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 일종의 사대주의라 할만하다. 건축관계자들에 따르면, 현장에서 최근 한국 건축사와 건축주 수준이 확실히 높아졌지만, 사대주의는 건축계에 여전히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최근 광주미술계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국내 건축사사무소 당선작을 두고 세계 유명 건축사에 의한 설계 재공모를 주장한 것은 이러한 외국 건축디자인 수입에 급급한 문화 사대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제 설계공모 형식으로 해외 8개 팀이 참가, 절차상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 9일 광주미술계 원로 중진화가와 역대 광주시립미술관장, 역대 광주미술협회장들이 광주 동구 예술의거리 관선제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광주비엔날레 새 전시관 설계 국제공모 당선작 무효와 세계적인 건축사를 통한 지명 재공모'를 촉구했다. 사진=광주in(http://www.gwangjuin.com)
지난 1월 9일 광주미술계 원로 중진화가와 역대 광주시립미술관장, 역대 광주미술협회장들이 광주 동구 예술의거리 관선제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광주비엔날레 새 전시관 설계 국제공모 당선작 무효와 세계적인 건축사를 통한 지명 재공모'를 촉구했다. 사진=광주in(http://www.gwangjuin.com)

A 건축사는 “외국 유명 건축설계업체에 설계를 맡겨 국내서 성공한 사례도 손에 꼽을 정도임에도 간판 외국설계업체에 줄을 서 기다리니 외국사가 국내 시장을 봉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건축주들의 외국 건축사만 좋아하는, 이른바 건축 사대주의로 인한 외국 설계업체 독식 심화는 국가적 관점에서도 다양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국내 기술 역량 감소로 인한 건축설계업체들의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국내 건축문화와 지역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부족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또 외국사가 컨소시엄의 실질적인 주관사임에도 실제 사업 주관은 국내 업체가 맡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설계변경의 경우에도 외국사의 경우엔 추가 업무에 따른 비용을 청구하지만, 국내는 설계비 안에서 잡무와 추가업무를 떠안는 식이다 보니, 이에 익숙한 발주기관 및 건축주들이 외국사와 논의하기를 꺼려 하고 국내 건축사사무소에 사후설계관리업무를 요구하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외국건축사만 좋은 일 시키고, 배만 불리는 셈이라는 자조적인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정책 및 지원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 공쟁을 통해 업계 스스로 노력하고 발전시켜 외국 건축사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민간은 어쩔 수 없더라도 최소한 공공분야는 국내 건축사와 외국 건축사에게 똑같은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의견이 높다.

B 건축사는 “시공사, 재건축조합들이 명망 있는 건축사를 찾아 거액의 설계비를 쏟아붓지만, 훌륭한 국내 건축사는 외면하기 일쑤다”며 “객관적인 잣대로 국내 건축사사무소들을 평가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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