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숙 건축사(사진=강명숙 건축사)
강명숙 건축사(사진=강명숙 건축사)

제주 애월 포구에 있는 오래된 횟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식당에는 실내 자쿠지 마냥 오픈된 수조가 있었고 수조에서 바로바로 활어를 꺼내 음식을 만들어 준다. 애월 포구와 맞닿아 있어 고기잡이배가 식당 앞까지 들어올 수 있으며, 갓 잡은 활어들은 실내 수조로 옮겨진다. 실내 수조의 비릿한 냄새와 매운탕의 칼칼한 향이 뒤섞인 가운데 여느 오래된 식당처럼 낡은 기물들과 손맛 좋은 주인장의 털털한 목소리가 맴도는 평범한 식당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서쪽 유리창 상부에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가로로 긴 장방형의 길을 형상화한 미술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간접조명이 은은히 비치는 작품 속 길의 형상은 도시 가로 혹은 마을 길을 닮아 있었다. 오래되고 평범한 식당에 저렇게 눈길을 끄는 작품이 걸려 있다니 내 눈을 의심하며 안경을 끼고 다시 올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미술작품은 아니었고, 서쪽에 위치한 주방에 들이치는 서향 빛을 막기 위해 고측창에 붙여진 파란색의 썬팅지였다. 썬팅지는 강렬한 서향에 의해 갈기 갈기 갈라져 길의 형상처럼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장에게 원래 저런 문양의 썬팅지였냐고 물어도 봤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잘 모른다고 하는 걸로 보아 시간이 만들어준 문양인 듯하다. 시간이 만들어준 문양은 신기하게도 오래된 도시의 구조인 듯 또, 친숙한 마을의 길인 듯 자연스러웠다. 

그리드 격자 체계가 아닌 유선형의 길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실핏줄의 골목길은 오래된 마을과 도시의 특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러움은 배가 되고 그 길에 형성된 집들은 길에 순응하여 시간을 머금고 있다. 우연찮게도 최근 열흘 사이에 오래된 길을 품는 마을들을 여행하게 되었다. 제주의 올레길을 간직한 ‘오조리 마을’, 서울한양도성 성곽아래 위치한 ‘369 성곽마을’, 통영의 동쪽 벼랑 마을 ‘동피랑’, 한려수도의 끝자락 욕지도의 ‘좌부랑개 마을’이다.

오래된 마을을 다니면서 실핏줄처럼 갈라진 횟집 썬팅지 문양이 마을의 길과 오버랩이 되었다. 단순히 식사를 하기 위해 갔던 식당에서 본 장면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고, 여행 연장선상에 맴돌았다. 인위적인 계획이 아닌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마을의 길과 집의 형상들이 나의 눈길을 끄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이유들을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는 없겠지만, 두 가지 정도로 요약을 해볼 수 있겠다.

첫째는 뜻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다. 계획가나 설계자가 관여하지 않는 자연발생적인 상황들이 모여 시간이 축척됨에 따라 형성되어가는 자연스러움이다. 좁은 길이라도 지형에 따라 다시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갈라진다. 그 길들은 걷는 이에게 너무나도 가깝게 다가와 있다.

두 번째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치열한 삶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다. 넉넉하게 계획되지 못한 길은 주어진 상황에 맞게 집들이 들어서 있고, 그 집들은 최소한의 대문, 최소한의 화장실, 최소한의 옥상, 최소한의 다락들이 모여 최소한의 간섭으로 치열하게 집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옥상에서는 한끼 식사가 해결될 만큼의 채소가 심겨 있는 선홍색 다라이들이 옹기종기 놓여져 있다.

삶이 치열하게 축척된 실핏줄 같은 골목길의 자연스러움을 보고 있노라면 갓 푸르름을 띄기 시작한 신록만큼이나 앞으로의 더 짙어질 골목길을 예찬하게 된다. 그리고 점심을 먹었던 횟집에서 우연히 귀한 것을 봤듯이 나는 마을 길에서 귀한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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