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16

-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 김영승 시집 ‘반성’ 중에서/  민음사/ 2014년

후래자삼배(後來者三盃)라는, 술꾼들 사이에서 횡행하는 강제가 있었다. 술자리에 늦은 사람은 술 석 잔을 거푸 마셔 일찍 온 사람들과 어느 정도 취기를 맞춰야 한다는 화류계(?)의 불문율이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따르고 싶지 않는 강제지만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취기가 다르면 언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달라지면 같은 의미를 얘기하는데도 서로 이해가 엇갈려 다툼이 날 수 있다. 싸움 중에서도 제일 한심한 싸움이니 술 석 잔으로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싸움을 피해 보자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어떤가? 이 시는. 설명이 필요 없다. 시가 너무 빤한 얘기를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김영승의 시는 사람들의 말문을 닫아 버리게 만드는 독특한 정황이 뱀처럼 똬리 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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