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 이후

- 배진우

우리 집은 
그 거리 끝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
빈집에서
늙은 거리에서
갈가리 찢긴 편지에서

방에서는 어느 곳에 서 있다가
조금만 발을 옮겨도 가까운 창이 달라졌다

지붕 위 그림자가 스치고 지붕 위 색을 더하고
아픈 곳은 자주 자리를 옮겼다

한 명이 살았고

한 명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

빛을 오래 가두고 싶었던 건축처럼

 

- 배진우 시집 ‘얼룩말 상자’/  민음사/ 2023년

우리는 벌거숭이 임금님의 우화를 알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하는 말에 사람들은 쉽게 속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을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믿을까? 이 시인은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어화 하고 있다. 그는 주장하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구조화하기 위해 단어와 단어의 사이를 지연시키고, 주어와 목적어를 병치시키며 공간을 한없이 늘리기도 한다. “빛을 오래 가두고 싶었던 건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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