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갈
- 원구식
참을 수 있다면 유혹이 아니다.
저주받은 이 피의 계보는
물처럼 흐르되
결코 증발되지 않는 모래의 집적 속에 있다.
시간의 문지기인 모래는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땅의 내장을 야금야금
봉인된 시간 속에 넣어버렸다.
그날 이후 시간의 지렁이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0.01초도 안 걸렸다.
(사방에 지렁이가 없는 이유를
이제 알 것이다)
비를 뿌리는 한 때의 구름이
죽을힘을 다해 겨우 빠져나간 뒤,
사막은 정지된 풍경이다.
그러니까, 굳어버린 시간의 독이다.
이 시간은 모습도 없고, 소리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매우 생리적이다. 보라, 자신의 하초를
치명적인 독으로
봉인해버린, 저 미물을!
- 원구식 시집 ‘비’ 중에서/ 문학과 지성사/ 2015년
시인의 피는 O형도 B형도 AB형도, A형도 아닌 ‘나쁜피’다.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 ‘나쁜피(mauvais sang)’ 이후 시인의 피는 그렇게 돼 버렸다. 그로부터 시인은 가장 천한 자이면서 가장 고귀한 자가 되어버렸다. 랭보는 19세에 시쓰기를 그만두고 노동자가 된다. 네덜란드 식민지 군에 용병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무기 밀수에 가담하기도 했다. 결국 다리가 잘린 채 그는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는 때로 가장 치명적인 독이기도 하다.
함성호 시인
haamx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