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 중에서/ 민음사/ 1995년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파경이라고 부른다. 상황이 상황을 반성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파국이라고 부른다. 졸렬과 수치가 자신을 반성하면 우리는 그것을 의(義)라고 부른다. 맹자는 올고 그른 것을 가리는 걸 지(知)라고 불렀다. 의는 수오지심 (羞惡之心), 부끄러운 걸 아는 마음이라고 불렀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일, 남의 것을 빼앗는 일, 거짓말하여 이익을 취하는 일, 그 일을 반성하는 게 의(義)다. 뻔뻔하고 수치를 모르는 자들이 너무 많은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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