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병산서원(安東 屛山書院)은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은 낙동강을 바라보며 있다. 그 강 너머 화산(花山) 아래 나지막하게 병산서원이 있다. 강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화산 건너편에는 풍산 류씨(柳氏) 집성촌인 하회마을이 있다.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이곳 안동 병산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여,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진=김진섭 건축사)
(사진=김진섭 건축사)

병산서원의 역사
고려시대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선조 5년)에 서애 류성룡이 안동으로 옮겨오면서부터 병산서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면서 유림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는 중에 서애 류성룡이 부친상을 당하고 하회에 와 있을 때 그 일을 류성룡에게 문의하니,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년)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았으며, 유림 선현을 모시고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사진=김진섭 건축사)
(사진=김진섭 건축사)

휴식과 강학의 공간, 만대루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좁은 도로로 되어있다. 낙동강을 따라서 굽이굽이 들어가면 고요하게 펼쳐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을 만난다. 서원의 앞으로 낙동강이 휘돌아 흐르고, 낙동강에 비친 병산은 한 폭의 수묵화를 떠오르게 한다.

풍수지리로 보면 병산서원은 주산이 화산이고 좌, 우청룡의 맥이 흐른다. 마주 보는 병산은 안산(案山)이고 북쪽 원경의 학가산(鶴駕山)이 조산(祖山)이 된다. 그 품에 앉은 서원 앞으로 강이 흐르니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이다. 그래서 서원 중에서도 ‘자연과 서원의 조화’로 병산서원을 최고로 꼽는다.

여름의 병산서원은 입구부터 화사한 배롱나무가 반긴다. 처음 들어서는 복례문은 낮은 솟을삼문이다. ‘자기를 낮추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이다.’라는 복례의 뜻을 새기고 들어서면 병산서원의 백미인 만대루가 보인다. 만대(晩對)’는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해질녘에 마주하기 마땅하고’하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만대루 앞에 서면 정갈한 7칸의 기둥 사이로 강과 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서원의 중심인 입교당의 마루에 앉으면 만대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병풍처럼 펼쳐진 경치가 기대 이상의 감동과 차경(借景)의 감흥을 선사한다.

병산서원의 모든 건축은 자연과 인간의 상생(相生)이다. 그 바탕은 입지의 자연성과 경관의 개방성을 통해 성리학이 추구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닿아있다. 여기에 배향 인물인 서애 류성룡의 사상과 삶의 철학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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