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숨은 장마처럼

- 류성훈


  긴 숨은 장마처럼 
  젖어서 온다, 밤과 널 볼 수 없어
  절상과 어울리는 침상은 
  엎지르기 전의 물잔은
  아무도 걷지 않는 커튼과
  내 뜨거웠던 도가니와
  네 벌어진 솔기는, 그리고 비는
  돌아가기 어려운 쪽으로만 아물었다
  왜 이제 왔어
  왜 아직 여기 있어
  부러진 가지들을 이어 붙이는 계절을
  가을이라고 부르고 싶어
  터진 옷에서 터진 옷으로 갈아입는
  우리의 밤은 꺾이지 않았어 그렇게
  주여 주여 주여,를 외치며
  충분히 쓰게 웃던 입술의 꿈이
  뼈도 없이 창가에 서 있다

 

- 류성훈 시집 ‘라디오미르’ 중에서/  파란/ 2023년

이별은 대개 갑작스럽게 오지 않는다. 특히 남녀 간의 이별은 더욱 그렇다. 이별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에게도, 이별은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단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그것을 ‘칼에 베인 듯이’ 느껴야 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일이 된다. 사실은, 갑작스러운 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과의 지나간 시간들이 부정적이라도 보상되기 때문이다. 이유를 몰라서 이유를 묻는 게 아니다.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니다. 그러지 않으면 “뼈도 없이” 주저 앉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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