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건축사(사진=이승환 건축사)
이승환 건축사(사진=이승환 건축사)

많은 사람들이 건축 설계공모판의 로비를 관행이라고 한다. 로비나 사전접촉 없이는 당선이 어렵다며 어쩔 수 없는 일쯤으로 여긴다. 심지어 영업의 한 방법이라고 미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 개정된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 제12조 제5항은 심사행위가 청탁금지법에 의한 공무수행사인으로서 규정 위반 시 처벌이 가능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금품 수수의 대가성이 입증되면 형법에 따라 가중 처벌되기도 한다. 이건 관행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보통 설계공모 참가자를 선수라고, 또 심사위원을 심판이라고 부른다. 승패가 갈리는 운동 경기와 비슷하기에 쉽게 납득이 가는 비유다. 만일 심판이 경기 중에 편파적 판정을 하면 야유를 보내며 비디오 판독을 통해 오류를 찾아내려 한다. 오심 가지고도 이 정도인데, 만약 한 선수가 승부 조작을 해서 경기 결과를 조작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 선수는 스포츠 정신 위배라는 낙인이 찍혀 스포츠계에서 영원히 퇴출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나라 건축 설계판에서는 이런 범죄가 이토록 관대하게 취급되는가? 현실적으로 적발할 수 있는 장치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 범죄자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설계사무소들이고, 또 저명한 교수들이어서 그런 것인가?

앞으로 우리나라의 건축계를 짊어질 젊은 건축인들 중 다수는 남들보다 1년 더 긴 대학 생활을 보내고, 야근 박봉에 시달리며 어렵사리 경력을 쌓아 건축사시험을 볼 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합격률이 10%도 안 되는 바늘구멍을 뚫어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설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힘들게 홀로 서서 마주한 벌판이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는 설계공모판이다. 그들이 끝 모를 절망감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그 절망감은 독립한 건축사만의 것이 아니다. 로비로 야금야금 빠져나가는 돈은 사실 직원들 월급에 더해져야 할 돈이다. 10억짜리 설계비의 로비 시세가 3천만 원이라고 하면, 1년 동안 세 명 직원의 연봉이 천만 원씩 줄어드는 셈이다. 로비하는 사무소 입장에서는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서는 설계공모에서 이겨야 하고, 그러려면 로비가 꼭 필요하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지출된 돈이 건축계에서 순환이 될까? 심사위원이 교수라면 그 돈을 받아 학생들 교육에 재투자할까? 그럴 리 만무하다. 그냥 건축 설계업계의 제살 깎아먹기이고, 누군가 그 틈에 웃으며 배를 불리고 있을 뿐이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이런 범죄가 지금 세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사무실 블로그에 이런 댓글이 달린 적이 있다. 로비로 먹고사는 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독립을 했는데 자기가 쌓은 경력을 내세울 수 없어 씁쓸하고 막막하다고. 이 분은 그래도 윤리 의식을 끝까지 지켜 다행이다. 이런 부정행위에 스스로 무감각해져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가장 무섭다. 공모전 제출일,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는 인쇄업체 웹하드에 대놓고 홍보물폴더를 만드는 해프닝도 그래서 일어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젊은 건축인들은 무력감에 몸부림치고, 그런 선배들을 본 학생들은 건축설계의 꿈을 접는다. 그런 와중에 기성세대는 나부터 살아남자고 공멸의 길을 알면서도 걷는다. 그런데 마땅한 답이 없다. 지금까지 정책과 제도를 여러 번 손봤지만 로비가 늘면 늘었지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외려 좋은 정책은 누군가 압력을 넣어 없애려 한다. 한마디로 아사리판이다.

비록 현실은 이렇게 절망적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있다고 믿는다. 사전접촉 시도 의심 사례를 접하면 공모전 담당 주무관과 건축사협회 부조리신고센터에 신고할 수 있다. 또 발주처에서 심사 결과를 세움터에 공개하지 않으면 국토부나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 신청을 하여 공개를 촉구할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건축 협회나 단체를 통해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청렴 선언을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설계공모 경험을 통해 청렴한, 또는 부패한 것으로 추정되는 심사위원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면 주변 건축인과 공유하는 것도 좋다. 공표만 하지 않으면 된다. 건축사협회 또한 익명 제보 창구를 만들어 건축인들이 신고 시 느끼는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 물론 허위 신고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경고와 감시 정도의 조치를 취하는 것만으로 로비 심리를 어느 정도 위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설계공모 환경을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올바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결국 사람의 일인지라, 선수든 심판이든 현장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 설계 공모판의 부정과 비리는 오래된 악습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젊은 건축인들이 이를 이어받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없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 모두, 쉽게 포기는 말자.

저작권자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