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지 않은 방

- 김해선

나뭇가지 위에 웅덩이가 걸려 있다
웅덩이 깊숙이 내려가면 빈방 하나 있다
벽지 뒤에 새벽이 숨어 있을 것 같아 벽지를 찢는다
곰팡이가 활짝 피어 있다
태양 아래 백사장이 펼쳐진 것처럼 닿을 수 없는 곳까지
팡이 흰꽃들이 가득 피어 있다
꽃들이 서로 격렬하게 뭉쳐 간다
흰 모래밭에 의자를 놓고 앉아 먼 곳을 보거나
전화를 하며 어딘가에 계속 붙어 있을 벽지를 찢으며
봄을 밤으로 밤을 사막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검고 푸른 이파리로 변해 간다
빗줄기와 밤이 동시에 나타난다
함께 죽는 곳을 보여 준다


- 김해선 시집 ‘나의 해적’ 중에서/  파란/ 2023년

애도가 불가능해질 때 우리는 극심한 우울에 빠진다. 불가능한 애도는 무엇이든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지 않기 위해서 자신만의 무덤을 판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금지한 크레온의 명령을 어긴다. 크레온은 법을 어긴 안티고네를 감금하고 안티고네는 스스로 목을 매고 죽는다. 아마도 그 방향은 나뭇가지로 올라갔다가 웅덩이의 깊은 곳으로 다시 내려와 벽이라는 어둠에서 끝없이 나타나는 죽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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