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숙 건축사(사진=강명숙 건축사)
강명숙 건축사(사진=강명숙 건축사)

숨을 잠시만 멈추면 새소리와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할머니들의 구수한 제주말 대화소리가 들린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도 그 소리들에 장단을 맞추는 듯하다. 잠시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내려놓고 주변을 살핀다. 나에게도 눈길을 달라하는 식물들에게 흠뻑 물을 주고 나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한다. 제주 마을 고내리에 사무실을 옮긴 이후 나의 일하는 패턴이다. 마을이 주는 시간에 맞춰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하는 하루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고3 아이의 등교를 같이 챙겨주다 보면 고내리에 있는 사무실에 도착하는 시각은 아침 7시 20분정도가 된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천창으로 보이는 폭낭(팽나무)의 새순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어제보다 좀 더 풍성하고, 연둣빛이 초록이 되어가고 있다. 남쪽 통창에는 길고양이 네다섯 마리가 줄을 맞추어 앉아있다. 일찍 왔음에도 좀 더 일찍 오지하는 바람의 눈동자들. 서둘러 밥을 챙겨준다. 배가 고팠을 텐데 고양이들은 싸우지 않고 한 마리씩 줄을 서서 밥을 먹는다.

커피 한잔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주변으로는 길고양이들이 맴돌고 동쪽 천창의 빛은 2~3미터 떨어져 내 옆에서 빛을 발산하고 있다. 오전 마을 정비하러 나선 어르신들의 대화소리가 들린다. 여럿이 모여계시다 돌아오는 길엔 삼삼오오 대문 앞이나 폭낭 아래에서 못 다한 수다들을 나누신다. “게난 이녁은 어떵 살맨”(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아이고 어떵 살기는예~~ 요즘 하간디가 아팡으네예”(어떻게 살기는요~ 요즘 여기저기가 많이 아파요) 염탐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듣고 있노라면 참으로 편한 제주말 대화소리이다. 

각설하고 일을 좀 하다싶으면 동쪽 천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아침부터 정오가 되기 전까지 점점 각도를 남쪽으로 틀다가 정오 이후 나의 모니터를 강타한다. 이제 점심시간이다. 혼자 일하는 1인 사무실이라 때를 놓칠 때가 많으나 동쪽 천창은 일을 잠시 멈추라고 모니터에 엄청난 빛을 보낸다. 점심을 먹고 들어오면 강렬했던 빛은 어느새 서쪽을 향해 가고 있다. 

사무실은 면한 길보다 폭이 좁은 집이다. 그리고 서향이다. 봄·가을 오후가 되면 햇빛에 몸 숨길새 없이 실내 공간 깊숙이 빛이 들어온다. 빛은 지나가는 구름에 의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한다. 살짝 열어놓은 블라인드의 결에 따라 공간은 가로의 줄무늬가 새겨진다. 

빛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작은 사무실은 인테리어를 따로 안 해도 될 만큼 실시간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다채롭고 기세등등하게 들어오던 서향 빛은 오후 5시 정도 되면 얌전해진다.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어 간다. 마실 나갔던 고양이들이 속속 들어온다. 귀가를 하는 어린이집 차량이 보이고 고내포구의 노을이 질 때 쯤 나도 일을 마무리한다.

문을 닫고 퇴근하지만, 사무실 옆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지면서 마을은 마을만의 또 다른 시간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렇게 낭만적인 하루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나날도 많다. 그럼에도 이글을 읽고 잠시 ‘쉼’을 떠올려도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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