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업무를 시작하면 책임감이 생긴다. 창조적인 작업의 시작에 가지게 되는 일종의 애착과 같은 감정일 것이다. 이 책임감은 건축물이 완공될 때까지, 혹은 그 이후 사용자가 만족스럽게 사용하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 때문인지 혹은 오랫동안 제도를 거스르는 현실이 만들어낸 것인지, 설계자가 사용승인 시까지 관계되는 모든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건축주가 많다. 이러한 이해 부족은 실시설계 도서를 제출할 때 설계용역비를 완납 받지 못하고, 수개월 혹은 수년 후 사용승인 시까지 잔금을 남겨두게 만들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잔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마저 발생한다. 많은 건축사들이 받지 못한 용역대가의 총액이 상당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유가 미수금의 주원인일 수도 있다.

설계자는 실시설계도서를 제출하며 설계용역 비용을 완납 받고, 착공신고는 건축주 혹은 시공자가 진행해야 한다. 시공과정에서 설계자는 설계의도구현 용역비용을 받고 업무를 하여야 하고, 사용승인에 필요한 도서작성과 행정업무 역시 건축주 혹은 시공자가 주체가 되어 진행하여야 한다. 가끔 건축주 혹은 시공자가 세움터(온라인 건축행정시스템)를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하여 설계자 혹은 감리자에게 해당 업무가 전달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러한 경우 합당한 대가기준이 마련되어 업무가 추가된 만큼의 용역비가 책정되어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건축설계와 시공과정에 다양한 절차와 규제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건축물 관리계획서’ 작성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누가 작성해야 하는지 정해진 것이 아니라서 결국 건축사가 추가적인 대가 없이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제도에 따라 업무량이 늘어나면 그때마다 해당 용역대가가 늘어나는 것이 맞을 것인데 민간건축물의 경우 늘어나기는커녕 수십 년째 제자리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업무는 늘어나고 대가는 그대로인데 알고 보니 그 업무가 우리가 해야 하는 업무도 아니었다니, 물건 한 개를 적은 이윤을 남기고 팔았는데 서비스로 두세 개 더 집어가 버리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건축주에게는 건축사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다양한 업무를 부탁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대가 없이 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기 어렵다.

잘못되어 있는 점이 발견되면 빠르게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함께하지 않으면 사회적인 통념을 거슬러 ‘다른 사무소에서는 다 해주던데요’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먼저 우리 건축사들이 각 업무의 주체가 누구인지 뚜렷이 알고, 건축주와 시공자에게 근거자료를 보여주고 설명하여 인지시킬 수 있도록 자료가 만들어지고 캠페인이 진행되어야 한다.

각 업무에 대한 합당한 용역대가를 산출하고 업무 진행 각 시점에 대가가 지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마다 설계과정에 필요한 일은 늘어나는데, 업무대가는 물가를 생각하면 오히려 줄어드는 셈이고, 알고 보니 우리가 해야 할 업무가 아닌 것을 하고 있었다니 개선이 필요하지 않은가. 함께, 그리고 빠르게 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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