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을 깜박이는 기하학적 공간

- 박상순 

 

심심한 앵무새와 흰 두 발 짐승

이라고 쓰고

물병 또는 사랑이라고 읽는다.

심심한 앵무새와 흰 두 발 짐승

이라고 쓰고

불평 또는 햇빛 쏟아지는 거리라고 읽는다.

또는 너에게, 또는 나에게, 라고도 읽는다.

 

우아한 곡선, 밤새도록 내리는 비

라고도 쓰고

심심한 앵무새 또는

휘저을 팔이 없는, 

흰 두 발 짐승이라고 읽는다.

 

- 박상순 시집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중에서/ 문학과지성사/ 2017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파이프를 그려 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구절을 적은(그린) 그림이 있다. A라고 쓰고 ‘A가 아니다’라고 읽는 시가 있다. 얼핏 마그리트의 그림과 그런 시는 유사해 보이지만, 어쩌면 시는 A라고 쓰고 어떤 방식으로든 다르게 읽는 일반적인 속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는’과 ‘무엇’은 형용과 대상으로, 반드시 어떤 연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관계가 서로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기표와 기의가 자의적 관계라면 문장과 문장요소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이 시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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