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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진섭 건축사)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
가락국의 마지막왕 구형왕의 능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에 자리잡고 있다. 지리산 상봉에서 불과 50리 정도의 거리에 있는 왕산(王山) 아래 능소(陵所)라고 불리는 곳이다. 지리산 깊은 계곡 마천에서 흘러 내려온 임천(臨川) 옆 덕양전(德讓殿)이 구형왕릉 입구다. 이곳에서 산 쪽으로 1km쯤 올라가면 구형왕릉이 나온다.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왕릉이라는 근거가 확실하지가 않아서 전 구형왕릉으로 불리었다. 앞에 전(傳)자가 붙은 이유는 그의 능이라는 확증이 없고,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71년 2월 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14호 전구형왕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인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으로 변경되었다.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
김해 수로왕릉 숭선전(崇善殿)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는 ‘신라가 강성하여 자주 침노하였으므로 구형왕이 백성이 많이 죽는 것과 또한 자신의 세대에 나라가 망했다는 소리를 남길 수 없다하여 아우에게 왕위를 넘기고 태자, 비(妃), 빈(嬪)을 거느리고 방장산(方丈山:지리산)의 태자궁으로 들어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홍의영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는 ‘방장산 동쪽 기슭에 산과 절이 있고 그 위쪽에 왕대(王臺)가 있으며 아래쪽에 왕릉이 있으므로 왕산(王山)이라 하고 능묘를 수호하는 절을 왕산사(王山寺)라 한다. 이 절은 왕의 수정궁(水晶宮)이다. 왕은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인데 신라에게 멸망하자 이곳으로 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장사지냈다’고 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구전으로 내려올 뿐 기록이 없어 사실로 증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신라에 나라를 넘겨준 가락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은 별궁인 산청의 지리산 수정궁(水晶宮)에서 나라 잃은 설움에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라를 보전하지 못한 내가 어찌 흙 속에 묻힐 수 있으랴. 차라리 돌 속에 들어가서라도 가야 백성을 지키겠노라.’ 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라를 넘겨줬기 때문에 양왕(讓王)이라 일컫고 스스로 심산유곡에 묻히기를 원했던 구형왕은 자신의 한(恨)을 외진 산골에 돌무덤으로 남긴 것이다. 6가야의 맹주로서 고구려 신라 백제와 함께 4국시대를 열어가며 찬란한 가야문화를 꽃피웠던 가락국은 주변 열강들의 세력다툼 속에 국운을 잃고 그만 신라에 나라를 내주고 말았다. 수로왕이 나라를 세운지 490년 만의 일이다.

그 후 가야제국(伽倻諸國)은 차례로 신라에 병합돼 서기 562년 대가야의 멸망을 끝으로 520년의 가야 역사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만다. 

밀양에서 양국(讓國)의 절차를 마친 구형왕은 왕자와 왕비 그리고 신하들을 거느리고 지품천현(知品川懸:지금의 산청) 지리산으로 떠날 때 신라는 구형왕을 상등으로 대우하고 가락국 전체를 식읍으로 삼게 했으나 이를 뿌리치고 산청 왕산의 수정궁에 은거하다 5년 후 세상을 떠났다.

능 아래쪽 1㎞ 지점에는 구형왕과 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인 덕양전(德讓殿)이 있다. 여기서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 문중은 구형왕과 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망향화를 드린다. 향화는 한때 전화로 중단되었다가 1798년 왕릉아래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린 뒤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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