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건축사(사진=이승환 건축사)
이승환 건축사(사진=이승환 건축사)

최근 건축 설계공모판에 이상한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작년 10LH 국정감사에서 대구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강대식 위원이 심사위원 사전 공개가 로비를 부추기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였고, 12월 초 국토부와 조달청, LH, 건축사협회, 건축학회 등이 모여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심사위원 사전 공개가 로비의 대상을 일찍 노출시켜 과열된 로비판을 조장하는 나쁜 제도일까, 아니면 최초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의 입법 취지대로 투명한 설계공모 운영을 통해 우수한 설계안을 뽑는 좋은 제도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심사위원 사전공개가 의무가 아니었을 때의 건축 설계공모판을 떠올려야 한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먼저 깜깜이 설계공모. 심사위원은 정해져 있지만, 공모전에 관여한 극소수 이외에는 정보가 통제되어 있는 경우다. 문제는 공모전의 선수 중 누구에게는 깜깜이가 아니라는 거다. 공개되지 않은 정보는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비밀리에 유출될 가능성이 크고, 로비력이 강한 회사는 바로 이 틈을 노린다. 소위 말아놓은판이다. 다음은 과거 소위 새벽 집 앞 로비전이라는 블랙코미디를 연출했던 심사위원 추첨제. 일정한 수의 심사위원 풀을 정하고 심사 직전 추첨으로 심사위원을 선정하는 제도다. 로비할 인력이 많은 큰 회사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며, 최근까지도 조달청 공모에서는 유효한 방식이다. 요즘은 굳이 새벽에 집 앞에서 기다릴 필요 없이 평소 심사위원 풀 전체를 꼼꼼하게 관리하거나 성공보수제를 통해 리스크를 줄이는 추세라고 한다.


그럼 심사위원을 사전에 공개하면 어떤 점이 좋은 걸까? 설계공모에 참여하는 선수의 입장에서 먼저 말하자면, 수년 동안 비싼 수업료를 내 가며 파악한 심사위원의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통해 낄 판과 끼지 말아야 할 판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거야말로 공공건축을 주 종목으로 하는 건축사사무소 최고의 영업기밀이다. 역시 같은 이유로, 가망 없는 공모전에 헛된 힘을 쓰기를 싫어하는 실력 있는 사무실들의 참가가 늘기 때문에 발주처의 입장에서도 공모전 흥행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심사위원진에 이름이 알려진 건축사들이 많을수록 그 효과는 더 커진다.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의 설계공모 운영지침도 입법 당시부터 이를 의도했으며, 국가건축정책위원회 또한 심사위원 사전 공개를 9대 혁신과제 중 하나로 꼽아 당시 별도의 설계공모 운영지침으로 운영되고 있던 조달청과 LH 공모전에도 적용하게 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심사위원 사전공개가 가져온 변화가 누구에게는 편하게 느껴질 리 없다. 특히 과거 몇몇 업체가 판을 주도하던 조달청이나 LH 공모전, 텃세가 센 지역 공모전이 그렇다. 심사위원 풀이 공모전 초반에 공개되면서 신생 업체들에게는 로비의 문턱이 눈에 띄게 낮아졌고, 반대로 오랜 인맥과 노하우를 통해 막강한 로비 경쟁력을 가지고 있던 전통 강호들은 그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국정감사에서 강대식 위원이 던진 질문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번 제도 개악 시도가 매우 걱정되는 이유는, 결국 로비를 없애지도 못할 거면서 심사위원 사전 공개의 순기능도 막아버린다는 데 있다. 더구나 지금 국토부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처럼 공개시점을 공모안 제출 이후로 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제출 시점부터 심사까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되는 기간 동안 로비와 사전접촉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모든 문제는 심사위원과 업체의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비롯한다. 조달청 운영기준에 따르면 참가자 또는 참가자의 공모안을 인식하게 하는 행위를 사전접촉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심사위원이 참가자와 그의 공모안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심사위원이 일단 만남을 수락해야 한다. 즉 먼저 공동운명체가 될 것을 각오하고 나서야 사전접촉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발이나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이런 이유로 설계공모판에서는 로비와 사전접촉을 으레 하는 것쯤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조달청 공청회에서 한 업체가 요즘 로비하기 어려워졌다며 푸념 섞인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기도 하고, 신문 기사에 요즘의 로비 시세가 공공연하게 나와도 누구 하나 수사 받지 않는다. 오히려 요즘 젊은 심사위원들이 돈맛을 알았다며 팍팍한 현실을 탓하는 건축사들의 푸념에 더 주목한다. 공정과 상식을 외치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설계공모 심사위원 공개 시점 변경은 어불성설

현재의 사전접촉 금지 조항은 실효성 없어

건축사협회, 공정 설계공모 관리 TF 신설해 역할해 주길

이제 이런 비루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한다. 일단 심사위원 사전공개를 없애려는 시도를 당장 중지하라. 대신에 심사위원들이 사전접촉이 의심되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에 응할 의도가 없음을 명확하게 밝히는 프로토콜을 설계공모 운영지침에 만들어라. 그리고 만약 심사위원이 이에 따르지 않고 사전접촉에 응할 의사를 보인다면 심사위원 자격을 박탈해라. 어떻게? 국토부나 건축사협회에 공정설계공모 관리 TF팀을 만들어서 사전접촉을 가장한 모니터링 전화를 걸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의무가입으로 대표성을 띠게 된 건축사협회가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모든 절차와 규정은 심사위원 위촉 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함정수사 아니냐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심사위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도 설계공모 운영지침이고 박탈하는 것도 설계공모 운영지침이다. 형법을 어겨서 받는 처벌이 아니란 이야기다.

나는 이런 제도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당장 우리나라 건축 설계공모판이 공정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미 거래가 튼 심사위원과 업체는 이런 모니터링 전화를 피해서 판을 말아먹을 방법을 얼마든지 생각해낼 것이고, 굳이 사전접촉이 아니더라도 건축계의 복잡다단한 네트워크로 인해 패자가 보기에 공정하지 않은 설계공모는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접촉으로 인한 로비라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막 이 지저분한 게임에 발을 담그려는 반칙 플레이어들의 수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어쨌거나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수십 년을 썩어서 흘렀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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