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

- 김안

살과 살
우리는 서로에게 쏟아지며
완성된 감옥이라면,
어제의 말, 오늘의 말, 
우리의 눈동자를 깨뜨리며 닥쳐올 말이
이 모든 말의 합이, 
우리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말의 기적들이
가을 들판에 일렁거리는 붉은 꽃, 
그 붉은 꽃의 사납고 부드러운 이빨, 
그 이빨을 뜯어 먹는 시간의 붉은 아가리라면,
들리지 않는 말, 들려오는 말, 기억되지 않는 말이
이 모든 말; 우리가 내는 모든 소리들의 말이
기억에 갇힌 채 귀를 막고 가라앉는 사랑이라면,
살과 살
그것은 온통
피로 씌어진 언어의 화살,
서로의 감옥 속으로 쏟아져 들어와 
모든 말이 없어질 때까지
서로의 입을 찢는,
찢긴 입 속으로 익사하며
기어코
기억이기를 단념하는,

- 김안 시집 ‘미제레레’  문예중앙/ 2014년

서정은 서사와 달리 대상에 깊이 되기를 신청한다. 그 말은 대상과 주체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암흑이다. 우주를 이루는 힘을 계산하다 보이는 물질로는 도저히 계산되지 않는 힘을 발견한 물리학자들은 빛에 반응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것을 암흑물질이라고 부른다. 서정은 서사로 얘기될 수 없는 ‘서로의 입을 찢는’ 얘기를 한다. 우리 입안에 그런 어둠, 그것이 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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