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학덕을 기린 사원
경주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이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인 1573년에 선조로부터 ‘옥산’이라 사액이 내려졌다.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루고 영남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된 이언적을 주향하는 서원으로서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정신적 본산이며,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대표 양식을 보여준다.

이언적은 관직을 그만두고 자신의 종가가 있는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의 근처 경주시 안강읍 옥산의 한 시냇가에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하고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연유로 이언적이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옥산서원을 세웠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독락당 주변 청절(淸絶)한 냇물을 끼고 있는 바위 다섯 곳에 각각 관어대(觀魚臺)·탁영대(濯纓臺)·세심대(洗心臺)·징심대(澄心臺)·영귀대(詠歸臺)라 이름한 오대(五臺) 중 세심대에 있으며,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나간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서원인 만큼 안동의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양대(兩大) 서원 역할을 했고, 나아가 한국 성리학의 연총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서원 중 하나로 한석봉, 김정희, 이산해 등 당대 명인의 친필 현판이 남아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문묘 종사 대현을 주향하는 영남의 대표서원이자, 세도정치에 대항할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영남 남인의 구심점이라는 성격 탓에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소 중 한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다
옥산서원은 산으로 둘러싸인, 경치가 멋진 자계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참나무를 비롯한 고목들과 넓은 반석이 어우러진 자계천이 서원 앞으로 휘돌아가고, 서원 앞으로는 자옥산이 펼쳐진다. 바로 뒤쪽은 화개산이 둘러싸고 있다.

옥산서원의 출입문인 역락문(亦樂門)은 논어의 첫 구절인 ‘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서 지었다. 이는 도산서원의 역락서재와 맥락이 같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공부하던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가 나온다. 누각을 올라가는 계단이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특이한 형태다. 무변루는 1572년 옥산서원이 창건되었을 때 함께 세워졌으며, 주변의 훌륭한 자연경관을 잘 조망할 수 있도록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규모는 정면 7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측면에는 가적 지붕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위층은 온돌방과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층은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둔 뒤 다시 좌우에 누마루를 구성하는 매우 독특한 평면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지붕에는 숭정(崇禎), 건륭(乾隆), 도광(道光) 등의 중국 연호가 기록된 명문 기와가 남아 있어 수리 이력을 정확하게 알게 해준다. 무변루는 끝없는 누각이라는 의미인데 본래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노수신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고 하여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을 따서 무변루로 고쳤다. 2022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으며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친필이다. 

옥산서원에서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구인당(求仁堂)은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마루 양쪽의 양진재와 해립재는 교사들이 지내는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공부하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동재 쪽에 더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지냈다고 한다. 구인당 정면에 걸려 있는 옥산서원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직전 54세에 쓴 글씨다.
이언적의 사당인 체인묘(體仁廟)는 신성한 공간이므로 추가로 담장을 둘렀다. 보통 서원에서 제향을 하는 사당에는 사(祀)자를 쓰는데 여기는 이언적을 높게 쳐서,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정도로 좀 더 격이 높은 경우에 사용하는 글자인 묘(廟)를 쓰고 있다.

옥산서원은 성리학과 관련된 한국의 문화적 전통의 탁월한 증거로 그 교육과 사회적 관습은 많은 부분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서원은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형되고 있고 그 결과 서원의 기능과 배치, 건축적인 면에서 변화를 겪고 토착화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특출한 증거이다.

하회마을 바로 옆에 있는 병산서원과는 달리 옥산서원은 양동마을에서 직선거리 8km 정도로 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 서원에 배향한 이언적의 고택인 무첨당과 그의 가문인 여강이씨의 본진이 양동마을에 있기에 그러한 관련성으로 인해 2010년 양동마을의 일부로 세계유산에 함께 등재되었다. 2019년 ‘한국의 서원’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재차 등재되어 2관왕이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옥산서원 주소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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