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철 건축사
조명철 건축사

진료차 병원에 갔다. 대기실에 앉아 멍하니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앞으로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아들로 보이는 듯한 장년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자(母子)가 눈에 띈 이유는 이끌리는 노인이 딱 봐도 고령임에도 발걸음이 빨랐기 때문이다. 살펴보니 노모(老母)의 손을 잡고 걷는 장년의 아들의 발걸음이 분주해 보였다. 아쉬운 마음에 탄식이 들었다. ‘아~ 조금만 천천히 걷지. 할머니 발바닥에 불나겠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노년이 되었음을 잊었나? 함께 외출하는 것이 처음이었던가? 그래서 미처 노모를 살피는 마음이 준비되지 못했나? 아들은 평소 어머니한테 서운한 마음이 있어서 지금 괜히 발걸음으로 투정을 부리는 건가? 혹시 모자지간이 아닌 건가? 이유가 어쨌든, 아들은 내 눈에 몹시도 괘씸하다. 

거꾸로 생각해본다. 엄마가 아이와 함께 걷는 것이라면, 엄마는 대게 아이에게 보폭을 맞추어 준다. 엄마가 제 아이의 손을 잡고도 아이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을 망각한다면 아이는 엄마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끌려가게 될 게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걷는 아이는 대게 그런 괘씸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 마음을 헤아려도 자식은 부모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동서고금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있어도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부모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식 사랑하는 일을 잘한다. 하지만 자녀의 마음은 부모 마음 같지 않아서 억지로라도 시키지 않으면, 눈치 주지 않으면 부모를 공경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역사는 오래전부터, 오래도록 “부모를 공경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출생신고부터 상(喪)까지⋯건축사는 건축물을 봉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4월경부터 ‘건축물 생애이력 관리시스템’에서 해체공사감리자가 감리일지를 작성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전에는 시스템만 있었지 감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세움터에서 신축허가 절차를 수행함으로 그 출생(出生)을 기록하고, 건축물 생애이력 관리시스템에서 건축물이 해체되는 과정을 기록하다 보니, 내 손으로 건축물의 상(喪)을 치른 것 같기도 하면서 문득, ‘아~ 우리 건축사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건축물을 봉양(奉養)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로에서 막 건축물 해체감리를 하나 끝내고 그런 상념(想念)에 잠겨있을 즈음에 병원에서 종종종 걸어가던 그 모자를 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처럼 제 노모의 발걸음조차 맞출 줄을 모르는 무심(無心)함이 우리 자신의 솔직함이고, 부모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이 적나라한 사실이라면 애초부터 효(孝)는 구름 같은 몽상일 지도 모를 일인데, 이러한 자격으로 건축물은 얼마나 봉양할 수 있을는지... 글쎄다. 애달픈 ‘불효자는 웁니다’가 전하는 가사를 듣노라면, 철든 불효자가 너무나도 늦어버린 통곡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건축계는 그동안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건축물 때문에 많이도 울었다. 가장 최근이 ‘광주 현산 아파트 붕괴’였던가.

요즘 경기가 정말로 꺾였는지, 해체감리도 건축감리도 설계도 수주량이 급전직하(急轉直下)했다. ‘건축물 봉양’도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불경기 찬바람에 옷 깃 잘 여미고 서로 안부 물어가며, 견디어 내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병원에서 뵈었던 꼬부랑 할머니가 오늘은 평안하신지, 계속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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