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집터잡기 고려사항에서 둘째는 방위라고 했는데 이것은 1천호가 넘는 도시 집터를 볼 때의 양택론에서 말하는 이론이고, 집자리는 우선 터의 형세를 살핀 다음, 기대고 앉을 뒷산(鎭山)과의 관계를 본다. 마을은 대체로 산기슭이 아닌 산자락에 배치되는데, 우리나라 산은 노년기라서 봉우리(정상)와 그 아래 비탈을 제외하면 사람이 살 수 있는 부분은 보통 세 가지로 구분된다. 산기슭과 산자락 그리고 들판이다. 산기슭은 경사도가 30도 이하로서 물매가 1/20 내외이고, 산자락은 1/30 정도, 들판은 1/100 이하이다. 물 빠짐이 비교적 좋은 물매는 1/50 이상은 되어야 하므로(근정전 마당의 물매가 1/50 정도이다) 우리나라 마을은 대체로 산자락에 배치되며, 산기슭이나 들판에는 배치되지 않는다. 들판은 경작지로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0년 혹은 30년 주기의 홍수에 침수하기 쉬운 단점이 있고, 산기슭은 올라 다니기도 불편할 뿐더러 우물이 나오기도 어려우며 산사태의 위험도 도사린 까닭이다. 만일 들판에 지어진 마을이 있다면 이것이 도시가 아닌 이상, 갑오경장 이후 일본식 도시계획의 영향을 받아 설촌(設村)된 신촌일 것이며(일본은 젊은 산이라 산사태가 많아서 산 곁에는 집이 붙지 않고 골짜기를 지나는 길에 면해 있다) 산기슭에 지어지는 집은 특수한 목적의(공부방이나 휴식과 제사공간으로 이용되는) 제실이거나 아니면 아주 가난해서 마을에서는 집터를 구할 수 없는 사람의 거처이다.

‘좌위’란 집의 주된 건물이 뒤를 높은 곳에 기대어 앉고 앞은 시원하게 멀리 떨어져 배치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인데, 산기슭과 산자락을 따지는 것은 집을 너무 뒷산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이다. 만일 도시에서처럼 뒷산이고 뭐고 따질 수가 없는 곳에서는, 뒷집 혹은 옆집이라도 서로 서로 기대는 것이 좋고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집을 틀어서 대문이 측면에 날 수 있도록 계획을 바꾸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외부에 폐쇄적인 집의 뒤란을 만들어서 집의 뒤, 프라이버시가 확보되는 공간을 확보하고 이쪽으로 출입구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좌위를 살필 때의 핵심은 이런 것이 아니라, 집의 주된 건물(주택에서는 안채)과 뒷산(鎭山)과의 시각적 관계 설정에 있다. 대문을 들어섰을 때 안채(대웅전 혹은 전각) 너머로 보이는 뒷산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점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뒷산의 형상이 오행으로 어떠냐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높게 평가하는 점은 진산답게 진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고 다음은 아름답거나 빼어남이다. 뒷산은 이 집의 뒷배를 봐주는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깊고 무거운 것이 힘도 있고 오래간다. 다음은 아름다운 것인데 잘못하면 집은 죽고 뒷산만 살아나는 단점이 있다. 절경지에 지은 절이 이런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의 집은 차라리 뒷산의 머슴처럼 바싹 엎드려 있는 것이 낫다. 절경에 정자를 배치할 때는 서로 반대쪽에 대비되게 앉히는 것이 핵심이다. 도담삼봉이나 하회의 부용정을 앉힐 때 꼭지에 배치하지 않는 것이 이런 이유이다.

▲ 남한강 도담삼봉(네이버 포토갤러리)
▲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 전경(네이버 백과사전)

집의 배경인 뒷산을 안채 용마루 어느 쪽에 얹힐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인데, 산의 형태를 5행으로 구분하여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뒷산의 꼭지를 집 용마루 중앙에는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뒷산은 어디까지나 후견인으로 버티고 있어야지, 맨 뒤에 축을 맞춰 앉아서 집주인을 겁박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경복궁 광화문을 세종로 네거리에서 보자. 얼마나 장엄한가! 광화문 너머 근정전의 실루엣이 그려지고 그 뒤로 목산(木山/봉우리가 세모꼴로 하나)인 백악이 축을 비뚤어 경복궁을 옹호하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자상한 자태로 바라보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 구조선총독부청사를 헐어내자는 논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다. 비록 일제가 강압적으로 지었지만 건물 자체는 예술적이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 아니냐는 논리였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광화문 뒤로 펼쳐지는 백악의 아름다움, 겸제가 즐겨 그렸던 인왕산의 웅대함, 그 사이에 아기자기하게 앉혀진 궐문들--뜯어내길 잘 했다고 모두 칭찬한다. (김영삼 정권에서 잘한 것은 이것 하나 밖에 없다고-- 그의 이런 과단성이 하나회를 깨뜨려 쿠데타의 가능성을 막고 금융 실명제를 실시해서 검은돈의 출처를 막았을 것이다) 20년 전에 필자가 정비계획을 세울 때는 주된 건물만 몇 개 복원하자는 주장이었는데, 이제는 광화문도 원래대로 틀어 앉히고 별 쓸모가 없는 부속건물까지 모두 복원하고 있다. 다만 광화문 육조거리 너른 광장에 쓸 데 없이 커다란 동상이 둘이나 들어서서, 비어 있음의 커다란 감흥을 반감시키고 있지만. 상상해 보라 세종로 네거리에서 1.5m나 낮은 시점에서 보는 광화문의 자태를-- 이제 50년 뒤 언젠가는 필자가 주장한 것처럼 육조거리가 그대로 복원되는 때를 기다려 본다.

▲ 광화문 전경

사찰의 뒷산은 빼어난 경관이 많다. 장성 백양사의 뒷산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사진 4> 뒷산은 화산(火山)으로 불꽃처럼 봉우리가 여럿인데도, 역시 대웅전 용마루 중앙에 뒷산을 놓지 않고 옆으로 펼치면서 집을 병풍처럼 감싸 안는다. 여기서의 특징은 집에의 출입을 뒷산을 향해 정면에서 하지 않고 측면으로 진입토록 계획하고 있다는 점이다.

▲ 백양사 대웅전과 뒷산

해남 미황사의 뒷산인 달마산도 화산으로 빼어나다. 여기에는 절집이 바짝 엎드려 있으면서 축을 틀어 배치함으로서, 절집의 엄숙함을 뒷산 앞에 경배하는 모습으로 읍소하고 있다. 지금 사세가 형편없을 때 없어진 마당 앞의 누마루집이 아직은 복원되지 않아서, 다락 밑을 끼어 올라왔을 때의 감흥을 맛보진 못하지만, 상상할 수는 있을 것이다.

▲ 미황사 대웅보전과 달마산

반면에 윤선도 가옥은 뒷산의 꼭지가 하나인 木山이다. 그 산 자락에 마을이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데 역시 도가(道家)답게 원칙적으로 배치했으며 우심장에 고택을, 좌 콩팥 자리에 연못을 시설하고 있다. 오행에서 콩팥은 물이고 심장은 불이다. 위장은 흙이고 간은 동쪽으로 나무이며 폐는 금인데 이 마을에서는 여기에 차례에 따라 하호가 배치되었다.

▲ 해남 윤선도 고택(녹우당)과 뒷산(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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