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공직생활 20년을 중도에 그만두고 건축사의 길로 접어든지 20년이 되었다. 큰돈을 벌겠다는 욕심보다는 조직의 틀에 박힌 생활을 벗어나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 직업을 바꾼 첫 번째 이유였다. 마치 새장 속의 새가 밖으로 나가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듯이. 그래도 내심 ‘공무원’이란 신분보다 ‘건축사’라는 직함이 사회적으로 더 인정받고 경제적으로도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개업도 하기 전에 명함을 만들어 돌리자마자 일이 들어왔다. 그것도 아파트 2만평 설계다.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상담과정에서 평당 설계비를 5만원으로 부를까하다 4만원을 제시했다. 그래도 8억이면~~ 의기양양해서 머릿속으로 장밋빛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 연락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2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다른 사무소와 계약을 했다고 한다. 20년간 온실 속에서 세상물정 모르다 된통 한 방 당한 것이다.

처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사업을 한다는 것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새장 속의 새, 토끼장 속의 집토끼가 한 겨울에 대책 없이 문 밖으로 뒤쳐 나와 허허벌판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문제는 나 혼자가 아니고 직원들과 가족을 책임지고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직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포장마차 주인이 그렇게 대단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벌어먹고 누군가를 먹인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노릇인가?

개발시대가 끝나 일감은 주는데 반해 건축사 숫자는 상대적으로 늘어가는 상황에서 2년 후에 IMF가 닥쳤다. 선배 건축사들은 나보고 좋은 직장 나와서 웬 고생이냐며 “이제 밥숟갈 놔야 되겠다”고 했다. 나는 “아직 수저도 안 들었는데 밥상을 치우려 드느냐”고 대꾸하며 밥도 못 먹고 설거지까지 해야 하는 처지를 농담 삼아 푸념 했다. 그런데 갈수록 태산이라고 지나고 보니 그 때가 그래도 봄날이었다. 지나온 20년간 숱한 우여곡절과 애환을 어찌 말과 글로 다 표현할까.

시작 당시 지역에서 함께 활동했던 선배 건축사분들은 거의 다 은퇴하고 이제 내가 원로(?)의 입장에서 호랑이등에 탄 심정으로 버텨오고 있다. 사무실은 그대로인데 직원 수가 대폭 줄었다. 초창기에는 여직원이 둘이나 있었는데 지금은 손수 움직이고 있다. 썰렁한 사무실에서 제대로 꽃 한 번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아직껏 죽지 않고 버티고 있는 화초처럼.. 그동안 몇 번이나 접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럴만한 결단과 용기도 없다.

얼마 전에 대학, 대학원을 같이 다닌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먹었다. 전공과 달리 불가마 찜질방을 운영하는데 하루 수입이 100만원 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한 달에 100만원 벌기도 버거운 나 보다 30배 더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방송출연, 건축문학상 당선, 현상설계 당선, 행복도시(행정중심복합도시) 에세이 공모 당선, 협회활동 및 회원들과의 동호회, 연구회 모임, 각종 사회활동 등 보람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건축사이기에 가능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후회는 없다. 당초의 바람대로 돈 보다는 자유롭게 살고 있으므로… 삼시세끼 밥 먹고 내 사무실에 믿음직스러운 직원 둘이 남아 있고, 아침에 출근할 곳이 있으며 주말마다 좋아하는 등산을 즐길 수 있기에 나는 행복하다고 스스로 위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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