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석헌 건축사
차석헌 건축사

이미 오래된 건축계의 여러 고민거리 중 하나가 ‘설계비 정상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높은 가격이 높은 가치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건축사’와 ‘건축사의 일’은 낮은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때문에 설계비 정상화는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고, 가치의 재정립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일까?

제대로 받기 전에, 제대로 주자
7월 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되었고, 내년도 최저임금은 사상 처음으로 9,000원대에 진입했다. 월급으로 환산하면 191만 4,440원이다. 하지만, 우리네 건축사보의 삶은 최저임금 노동자의 삶만큼 보호받고 있는지 의문이다. 건축사 업무대가 현실화를 위한 노력에 비해, 건축사보의 임금과 처우 개선은 혹시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전문직인 건축사보의 가치를 지킬 수 있어야, 건축사도, 건축계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제대로 받기”의 첫걸음은 “제대로 주기”이다. 건축사와 건축사보는 사용자와 피고용인의 관계 이전에 건축인으로서, 함께  성장해야 할 동반자여서다. 협회도 ‘미래의 건축사’인 건축사보의 보호와 육성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제대로 받기 위해, 제대로 거절하자
어느 사이 약자가 돼버린 건축사는 계약을 위한 무료 서비스를 강요받는다. “내 건물, 내 맘대로 하겠다”는 건축주의 억지나 “지금까지 평생 이렇게 해왔다”는 현장의 대거리를 감내하기도 쉽지 않다. 각종 심의나 인허가권자의 과도한 법리 해석에 날을 세우기도 어렵다. 발주처의 무리한 설계변경 요구나 건축사에게 전가되는 각종 인증업무에 정당한 대가를 요구해 인정받기는 더더욱 어렵다. 생각해 보면 소명의식을 가진 건축사들에게 자괴감을 가지게 할 상황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상황 속 선택의 기로에 우리는 서있다. 그 선택은 가치관이나 자존심, 때론 생존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나와 우리를 위해 거절하자.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절하한다면, ‘제대로 받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의 포기는 고스란히 다음의 우리에게 더 큰 생존의 무게로 전가될 뿐이다. 지금부터 함께 건축서비스의 품질과 책임을 정하고, 이를 위한 최소한의 규범과 가치를 정립해 나아가야 한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지켜보자. 가시밭길이지만 나아가야 할 길이라면 우리 함께 의지하며 헤쳐나가자. 그리고 서로 어깨 토닥이며 응원해 주자.

제대로 받고, 제대로 책임지자
시장경제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상관관계로 정해진다. 그래서, 건축사 과다 배출에 의한 저가수주와 건축서비스의 품질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일견 공감이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건축사 수가 조정된다고 해결되는 문제인가. 현실에선 한 명의 건축사가 별다른 제약 없이 무제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또 다른 공급과잉을 만들고 있다. 공급과잉의 문제는 저가 수주와 건축서비스의 품질 저하뿐 아니라 건축사 자격(면허)대여의 문제나 건축의 외주화를 부추긴다.

한 명의 건축사(하나의 건축사사무소)는 일정 기간 어느 정도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을까. 프로젝트의 성격, 퀄리티, 개개인마다의 능력 차이,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건축사보)의 인원구성 등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분명히 알고 있다. 책임 있는 설계를 위한 총량적 한계에 대한 우리 모두의 고민이 필요하다.

건축물대장에 등재되는 주요 정보 중에는 설계자, 감리자 항목이 있다. 그 건축물이 존재하는 동안 각인되어 관리돼야 하는 정보인 것이고, 건축사의 책임의 무게는 그만큼 무겁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날이 갈수록 법적 책임과 업무는 가중되고,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강요받고 있지만, 건축사의 자리는 주목받는 곳보다 책임지는 곳에 가깝다.
사회의 요구가 그렇다면 등 떠밀려 주춤대지 말고 먼저 한걸음 나서자. 공들여 건축물대장을 열람하는 수고로움 없이 지도에서 건축물의 위치를 검색하면, 누구나 그 건축물의 설계자를 알 수 있도록, 설계자를 검색하면 지금까지 설계한 건축물을 모두 볼 수 있도록 만든다면 어떨까. 건축사의 이름을, 건축사사무소의 이름을 내걸고 책임지는 모습이 선행되어야, 건축사가 존중받을 수 있다.
제대로 책임지고 제대로 받자.

용기가 만드는 가치
제대로 주고, 제대로 거절하고, 제대로 책임질 수 있는 용기. 건축사 모두의 용기 있는 행동이 ‘건강한 건축의 가치’를 만든다. ‘가치’가 인정받을 때, 비로소 ‘설계비 정상화’가 가능하다. ‘제대로 받기’와 함께 ‘인정받는 가치 만들기’가 중요한 이유이다.

서울특별시건축사회 청년위원회의 위원으로 ‘2021 서울청년건축사 세미나’에서 제대로 일하고, 제대로 받고, 제대로 책임지자는 ‘제대로 626건축운동’ 챌린지에 동참했다. 참여한 청년건축사 중 한 사람으로서 가졌던 개인적인 생각을 덧대어 이렇게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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