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형 건축사
서재형 건축사

때때로 농촌과 도시는 반의어처럼 쓰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설령 반의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적인 개념으로 비교 대상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인구의 밀도, 산업의 유형, 교통망과 편의시설, 생활환경과 자연환경, 토지이용과 공간구조, 일자리, 투자 수요 등 수없이 많은 사항에서 농촌과 도시는 많은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삶의 공간’이라는 개념에서는 농촌과 도시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즉, 주어진 환경과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행태나 유형은 다를 수 있지만, 삶의 가치와 욕구까지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농촌의 공간도 건축사에 의해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삶의 공간’을 창조하고 연출하는 최고의 전문가는 건축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국가 혹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하는 농어촌활성화사업에는 건축사의 참여가 몹시 제한되어 있다. 해당 사업에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농어촌정비법’ 때문이다. ‘농어촌정비법’과 시행령 및 시행규칙을 살펴보면, 건축사의 참여를 제도화한 규정은커녕 권장하는 문구조차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법 제63조에서는 ‘건축사법’에 의한 건축사업무신고 조항을 적용 제외하는 규정까지 있다. 그런데 농어촌활성화사업의 실상을 살펴보면, 건축행위와 관련된 사업이 해당 사업의 성과를 좌우할 만큼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그러한 법과 현실의 부조화로 인해 농어촌지역 삶의 공간이 질적으로 저하되거나 날조된 사례가 적지 않다.

그리고 설령, 건축사가 참여하더라도 업무범위와 대가를 건축사법에 의한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농어촌정비법’ 시행규칙 [별표5]에 규정된 ‘측량·설계 및 공사감리의 위탁요율 기준’을 적용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즉, 똑같은 건축물을 설계하고 감리하더라도 어떤 법률을 우선 적용하느냐에 따라 업무범위와 대가기준이 다르게 적용되는 우스꽝스러운 현상이 농어촌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1994년에 제정된 ‘농어촌정비법’은 농업생산기반 정비사업, 농어촌의 주택과 도로 등 농어촌생활환경 정비사업, 농어촌의 소득증대사업 등 이질적인 내용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밖에도 문제가 될 만한 규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그동안 농촌건축 활동을 해오면서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왔다. 그리고 관련된 사업에 참여했던 건축사들도 그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노력들이 모이고 모여서 근래에는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사업추진 지침 등에 의해 기획업무 또는 건축사의 공동참여 등을 도입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법률적인 뒷받침은 여전히 답보상태에 있고, 건축사와 건축사협회는 그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재차 강조하건대, ‘삶의 공간’이라는 점만큼은 농어촌과 도시가 같다. 따라서 농어촌활성화사업에 건축사가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에 호응하여 건축사들은 농어촌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공간적 특성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농어촌 고령자에 대한 배려, 마을단위의 공동체의식 회복, 농어업 등 생업에 적합한 공간 구성, 풍부한 자연환경의 차용과 조화, 농어촌과 해당 마을의 특성을 고려한 디자인, 주민들과의 소통과 참여 유도 등.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건축사의 전문성이 ‘농어촌정비법’에도 반드시 반영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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