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웅규 건축사
권웅규 건축사

지역에 기반을 둔 건축을 하겠노라고 호기롭게 성북동에 사무소를 오픈한지 몇 해가 지나던 때였다. 지역과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아등바등 여러 실험을 진행하던 중 우연히 성북문화재단에서 기획하고 있던 ‘성북도큐멘타’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역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재개발을 앞두고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던 새석관시장(성북구 석관동 338-18)을 건축적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새석관시장은 우리나라 초창기 상가아파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재래시장의 난전과 점포의 형태가 공존하고 있는 상가의 모습, 예전 연탄광의 흔적이 여전히 복도에 남아있는 공동주택의 모습은 과도기적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건물로 생각되었다. 그러한 오랜 건축물을 실측한다는 것은 그곳에 살았던,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 그 곳에 새겨진 결 하나하나를 천천히 읽어나가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삶의 흔적들은 상상만으로 따라가기엔 조금은 역부족이었다. 어느 곳 하나 반듯한 곳이 없었고, 손대면 바스러질 것만 같은 건물을 실측하기 위해 줄자를 드리우고, 사진을 찍는 작업들은 때로는 조심스러웠으며, 때로는 경건한 마음마저 들게 하였다. 희미해져버린 흔적들을 되짚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과 살면서 불편한 부분들을 조금씩 고쳐 만들었을 삶의 지혜들을 유추하면서, 부족하지만 건축이라는 시선을 통해 새석관시장을 담아보고자 한 작업이었다.

그 사이 장위동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 리모델링을 담당했었던 인연으로, 작년 말에는 장위동의 빈집(성북구 장위동 219-330) 하나를 대상으로 하는 아카이브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장위동의 좁고 경사 급한 골목 어귀를 지나 녹슨 대문을 열고 올라서면, 높다란 계단 위 마당 한가운데 동백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작은 단독주택이었다. 오래되기도 했거니와 비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낡음이 빠르게 진행 중인 그런 건물이었다. 새석관시장이 건축사적으로 의미를 가질만한 건물이었다면 장위동의 빈집은 우리가 어느 골목 끝에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건물이었다. 그런 건물의 아카이브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최근 장위동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그 의미는 조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동방고개 일대의 장위동 지역은 주변에 비해 조금은 느린 변화의 속도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근래 들어 재개발구역의 결정과 해제라는 진통을 겪게 되면서 변화의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있는 지역이 되었다. 성큼성큼 들어서고 있는 다가구, 다세대주택들은 장위동의 옛 풍경들을 빠른 속도로 지워나가고 있다. (같은 시각, 재개발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다른 장위동 지역은 대규모 집단 철거로 인해 황망하고 생경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개개인의 기억장면 속에 배경으로 존재하고 있는 옛집과 골목의 풍경들. 그 집에 살을 닿고 오래 살았던 사람과 그 앞을 무수히 지나다녔던 그 길의 많은 이웃들. 누군가에겐 추억 속 장면일수도, 또 누군가에겐 일상의 그저 그런 순간들이었을 수도 있는 풍경들. 결국 건축은 그러한 기억장면을 불러올 수 있는, 그 장소를 떠올리게 하는 최소의 기본단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각자의 기억장면들이 모여 옛집에 대한 모습이 되고, 그 집이 놓여 있던 골목의 풍경이 되며, 그 풍경들이 모여 장위동이라는 마을에 대한 전체적인 공유 기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옛집이 갑자기 사라지게 되면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바탕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고, 건물이 사라지면 장소가 사라지고, 그곳에 이어져 있던 기억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간 삶의 모습이 바뀌고, 생활방식이 바뀌고, 낡은 부분을 덧대어 손 본 빈집의 모습은 그 시절 삶의 흔적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건물 곳곳에 남아있었다. 지금보다 낙후한 재료와 공법으로 만들어진, 이렇다 할 보수공사 한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습들은 언뜻 건축적 순환구조에서 밀려난 듯 보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언젠가 우리가 떠올리며 추억해야 할 기억 장면의 소중한 배경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실측조사를 진행하면서 마주하게 된 옛집의 모습을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남겨 보고자 하였다.

최근 도시재생이 화두가 되면서 오랜 지역들의 아카이브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지역 아카이브의 여러 카테고리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축분야에 여러 건축사분들의 참여가 절실한 시점이다. 지역 아카이브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며, 특정 대상의 시대적, 사료적 가치를 기록하기 위함만도 아닐 것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지역 주민들 모두의 기억을 존중하고, 애정하며, 지속하여 이어갈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변화의 모습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지역 아카이브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의의가 아닐지. 그런 의미에서 많은 건축사분들의 지역에 대한 관심이 더더욱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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