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 건축사
김선욱 건축사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건축사의 기획업무가 무료라는 생각이 시장에 만연해 있다. 특히 규모가 큰 개발사업은 더욱 그러하기에,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할 때가 많다. 영업력 없이 배짱만으로 개업했던 초기에는 ‘이것도 투자다’라는 마음으로 또는 ‘혹시나’하는 기대감으로 수백 개의 크고 작은 기획업무를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루어진 무분별한 기획업무는 대부분 계약으로 연결되지 못하였고, 이런 경험을 토대로 현재 기획업무를 바라보는 나의 생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건축사업을 사업주체의 관점에서 분류해보면, 공익사업, 개발사업, 조합사업(재건축, 재개발 등), 토지주 자체 시행사업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공익사업은 공공에서 주로 추진하고, 설계공모나 입찰을 통해 업체 선정이 이루어지니, 할 말이 있어도 언급하지 않겠다.

개발사업은 ‘1. 될 사업을 잘 고르고, 2. 의뢰자와 나의 신뢰가 두터우며, 3. 결정권을 지닌 사람’일 때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기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상기 조건이 만족되지 않을 경우, 사업이 진행되지 않거나 혹은 나의 기획안으로 사업이 진행되더라도 수주하지 못할 확률이 95% 이상이라고 단언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건축사 전체의 위상이 하락하여, 수많은 선후배 건축사에게 피해를 줄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조합사업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정법)’에 의한 것과 ‘빈집 및 소규모주택정비에 관한 특례법(이하 소정법)’ 그리고 ‘주택법’에 의한 ‘지역(직장)주택조합(이하 지주택)’에 의한 사업으로 크게 구분된다. 도정법 사업은 어떠한 사업이라 할지라도 이제 막 시작하는 건축사나 소규모 업체를 운영하는 건축사가 수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개방된 공고와 입찰을 거치고 조합 총회에서 표결을 얻어 선정이 되어야 하는데, 조합 총회 시 실적이 부족한 건축사사무소는 표를 얻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결국 실적 문제로 조합사업에 특화되어 있는 사무소나 대형사무소가 선정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소정법 사업은 건축사사무소를 선정하는 데 있어 총회에서 의결을 거치면 수의계약 형식으로 사업 진행이 가능하나, 규모가 작기에 설계비 역시 작다. 이에 반해 조합과의 소통은 매우 까다롭기에 소통 능력이 좋고, 믿을 수 있는 정비업체와 협업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정비업체 없이 지주와 직접 소통하여 기획안을 작성하는 일은 추천하지 않는다. 도정법 사업과 소정법 사업 모두 사업성이 나오는지와 법정 동의율 확보 가능성을 기본으로 체크해야 함은 기본이고, 두 사업 모두 초기 설계비를 확보하지 못하고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주택은 최근 조합설립이 쉬워졌으나, 토지 확보가 매우 어려운 사업이다. 95%의 토지를 확보해야 간신히 매도청구권이 발생되는데, 95%의 토지를 확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라 판단되기에 토지매입 난이도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보통은 업무대행사가 건축사사무소를 접촉하여, 조합에 소개하는 방식이기에 업무대행사와 나와의 신뢰도도 중요하다. 만약, 조합과 계약을 못 하고 질질 끌려가는 상황이 되면 하소연할 주체도 없다. 물론 이 경우도 사업성과 조합원 모집의 난이도 검토는 기본이다.

마지막으로 토지주 자체 시행사업(이하 자체사업)이다. 이 글에서 사용한 의미는 토지주가 본인 건물을 짓는 사업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자체사업 중 소규모 사업은 친인척 정도의 친분이 없는 건축주의 경우, 기획업무에 대한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 옳다.

기획업무를 무료로 제공 후, 좋지 않게 끝나는 경우를 나열하자면, ‘1. 설계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2. 설계비가 비싸다며 오지 않는 경우, 3. 내 땅의 가치를 파악하고 매각하려 하는 경우, 4. 기존 설계의 확인이 목적인 경우’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1번의 경우는 그래도 이해할 만하다는 성격 좋은 건축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배가 아프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배가 아픈 원인이 손가락에 있다고 한다. 이 경우 두 가지를 가정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오진이고 또 하나는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일 경우이다.

건축사 역시 유사한 경험이 많다. 여하튼 오진이든 아니든 간에 진료비를 내지 않고 나올 사람이 있겠는가? 결국, 건축주가 무조건 나와 설계를 진행한다는 확신이 없는 이상, 소규모 자체 사업은 소액일지라도 기획업무 대가를 받아야 한다. 중·대규모의 자체 사업은 설계비도 작지 않고, 건축주마다 성격과 취향이 다르다 보니, ‘혹여?’라는 물음표가 있을 수 있는 분야로 판단된다. 그저 건축주의 비위를 잘 맞추면서 가능성을 타진하는 방법 말고는 없을 것 같다. 솔직히 추천하는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것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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