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산성 연주봉옹성에서 본 새해 맞이 ⓒ최진연기자

본지는 신년을 맞이해 새코너 ‘한국의 성곽을 찾아서’를 연재한다. 전국 곳곳의 우리 혼이 담긴 성곽에 대한 이야기, 에피소드 등을 사진과 함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30여년 구름처럼 바람처럼 산천을 떠돌았다. 내일당장 굴착기로 뭉개버릴 것 같아 신발 끈도 조이지 못한 채 험준한 산등성이를 넘고 때론 숲길, 들길도 헤매고 다녔다. 거기 2천 년 전, 또는 2백여 년 전 이름 모를 석공들이 쌓은 산성이 있었다.

인적하나 없는 산성에 오르자 옛 군사들의 숨소리, 혈전의 아비규환이 바람결에 들린다. 홀로 성벽 앞에서 아득한 역사와 대면하자 문득 나란 존재는 거대한 사막에 한 알의 모래알처럼 느껴진다.

우리 땅에 남아있는 성터는 어림잡아 2,400여 개소에 이른다. 최북단 DMZ 궁예도성에서 제주의 온평환해장성까지 필자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 500여개소의 성곽을 답사했다. 성곽은 우리민족의 마지막 보루임과 동시에 생존운명의 공동체였다. 수많은 역사의 진실이 불타고 묻힌 곳, 그 비밀창고를 찾아간다.

성곽 안에서 오천년 역사를 지켜온 나라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 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곽이 전국곳곳에 쌓여 있다. 높은 산에는 석성이 있고 낮은 산에는 토성이 있으며, 평지나 바닷가에서는 역사의 이끼가 낀 읍성의 성벽을 만날 수 가 있다.

유사 이래 국난의 순간들을 지켜본 성곽,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위해 목숨 바친 이름 없는 옛 군인들, 성곽을 지키려고 결사항전 했던 호국의지의 표상인 산성들이 아직도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퇴락, 방치돼 있다. 그중에서도 산성은 대부분 원형파악이 어렵고 남아있는 것 마저 토성은 유실되고 석성은 붕괴와 훼손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성곽은 언제부터 축성됐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기원전 2세기부터 기록에 전한다. 초기에는 나무기둥을 엮어 만든 목책성이었으며, 차츰 토성으로 발전해 갔다. 현재 복원해 놓은 ‘몽촌토성’의 목책성은 성이라기보다는 고향집의 울타리를 연상케 하지만 둔덕 같은 성벽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몽촌토성은 한강의 물줄기를 토성 밖으로 끌어들여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인력과 경비가 많이 드는 석성은 3세기 이후에 등장했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축성했는데, 성벽은 산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굽이굽이 계곡으로 내려가며 쌓았다. 골짜기에 성문과 수구를 설치하고 전망 좋은 곳에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던 장대도 구축했다.

또한 성벽 후미진 곳에는 비밀통로인 암문을 만들어 유사시에 군사들이 드나들었다. 때문에 우리의 성곽은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고 성안에서 오랫동안 항전을 할 수 있도록 시설을 고루고루 갖추었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축성술이 뛰어났다. 충북 단양의 ‘온달성’은 남한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고구려식 산성이다. 성벽은 남한강 상류절벽을 이용해 해발 400m의 산 정상에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특히 성벽의 휘어지는 곡선부분은 석성 쌓기에서 가장 고난도 기술을 요하는 구간인데, 이곳에서 고구려 조형미의 극치를 볼 수 있다.

백제는 두 번이나 천도를 한 불운 탓으로 삼국가운데 가장 많은 성곽을 축성했다. 백제의 성곽 중 금강과 황산벌이 한눈에 조망되는 부여군 임천의 ‘가림성’은 성벽겉면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쌓았다. 백제멸망 후 부흥군의 거점이기도 한 가림성은 백제성곽 중에서 축성연대가 밝혀진 유일한 성으로 백제의 기백이 묻어나는 산성이다.

고구려와 왜구의 침입이 끊이질 않던 신라는 이러한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일찍부터 성을 쌓기 시작했다. 신라의 대표적인 성곽은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이다. 이 산성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당시 전초기지로 삼았던 성이다. 성벽 둘레 1,680m, 높이가 20m, 폭 5m로 거대한 철옹성으로 신라성곽의 백미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성이다.

고려는 수많은 외침 때문에 석성보다는 경비가 적게 드는 토성을 많이 쌓았다. 특히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해안지방에 읍성을 많이 축성했다. 고려의 대표적인 산성은 ‘강화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에 대항해 내성(1,174m) 중성(5,381m) 외성(1만 1232m)3중으로 쌓은 대규모 산성이다.

조선의 성곽 가운데는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적 축성술인 ‘수원화성’이 대표적이다. 화성은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쌓은 성이다. 당대 최고 실학자 정약용이 설계하고, 영의정출신의 채제공이 감독을 맡아 1794에 축성공사를 시작해 2년 만에 완성했다.

화성은 팔달산을 중심에 두고 수원시가지를 타고 넘으며 약 5,8km에 달하는 성벽을 쌓았다. 4대문과 5곳의 암문, 2곳의 장대, 망대역할을 했던 공심돈도 3곳에 쌓았다. 4개의 각루와 대포를 설치한 포루(砲樓)5곳, 치성위에 대를 세워 누각을 지은 포루(鋪樓)5곳, 임금의 거처인 행궁, 유사시 연기와 횃불로 신호를 알리던 봉돈 등 건축물마다 특징을 살려 고색창연함이 묻어있다.

산성과 읍성을 아우른 수원화성은 ‘한국 성곽의 꽃’으로 평가받는다. 축성당시 원형이 보존된 서북공심돈과 방화수류정, 화홍문 등은 조선시대 문화의 향기가 가득 배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6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문화유산은 인류전체의 소중한 유산으로 인정돼 국제사회의 보호와 감시를 받는다.

우리나라 성곽의 특징은 성주일가족을 위해 쌓은 외국의 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유사시 인근의 백성들까지 성안으로 들어와 민, 관, 군이 함께 결사항전하며 피와 땀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인 동시에 부족국가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아득한 역사여정에서 기록이 불타고 파묻힌 곳이다. 그 잃어버린 과거의 진실이 성곽에 있다.

성곽안에서 오천년 역사를 지켜온 나라, 성곽의 파손과 인멸은 곧 우리의 정신이 무너지는 것이다. 하잘것없이 보이는 돌의 흔적이라도 우리에게는 귀중한 유적이며 문화재라는 것을 인식해 보존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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