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는 건축사 數 늘리기 능사 아니다”
건축사는 ‘건축물 안전’ 맞닿은 전문가…‘지나치게 배출하면 사회에 毒’
“5년제 학생들에게도 희망 주지 못해” 의견
건축사 數 급증에 생계 허덕이는 건축사들, 절박감에 ‘靑 청원’까지 호소
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장, 청원 관련 회원에게 문자발송 “청와대 국민청원 동참해달라”

올해 건축사 약 2500명이 신규 배출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건축사업계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6월 실시된 ‘2020년 제1회 건축사 자격시험’ 합격예정자가 1,306명이라고 7월 말 발표했다. 작년 합격자 수 1090명에 비해 약 20% 늘어난 수치다. 국내 전문직 중 유일하게 년 2회 시행되는 ‘건축사자격시험’은 올해 약 2500명 가까이 합격자를 배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건축사 자격자 2만3076명(’20년 7월말)이 되기까지 55년이 걸렸지만, 현 추세라면 5년 만에 절반인 1만 명이 넘는 건축사가 신규 배출되어 건축사 수급에 일대 지각변동이 불가피하다.

건축사가 많아질수록 더 많은 국민이 건축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대다수의 건축사들은 건축사가 늘면서 덤핑이 일상화되어 오히려 건축서비스 수준은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각종 재난발생으로 건축물 안전이 중요해지면서 ‘건축물 안전’을 책임지는 건축사가 경제적 어려움에 직업윤리를 저버릴 경우 그 피해가 결국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의견이다. 설계·감리 서비스 질은 건축사를 많이 배출한다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적정수준에서 선의의 경쟁이 일어날 수 있게 하여 능력있는 건축사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하고, 그러할 때 건축디자인 및 건축수준도 향상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2017년 국세청의 ‘전문직 사업장 현황’에 따르면 8대 전문직 가운데 건축사가 월매출 200만 원 미만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사업을 하는 건축사는 총 1만1846명으로 이중 2331명이 월매출 200만 원 미만으로 신고했으며, 개업 건축사 19.7% 5명 가운데 1명에 해당한다. 연 건축사 2500명 신규 배출 시대, 코로나 위기 '건축사 급증'에 시장은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전문직 직종별 월매출 200만 원 미만 사업자 현황
전문직 직종별 월매출 200만 원 미만 사업자 현황


◆ 변호사업계, 로스쿨 도입 후
   변호사 급증에 소송시장 정체,
   1만원짜리 상담도…
   청년 및 개인변호사 위주 
   어려움 가중, 양극화 더욱 심화


건축사업계와 비슷한 시기 로스쿨을 2012년 도입한 변호사업계를 살펴보면, 매년 1500명 이상의 변호사가 쏟아져 나오면서 경쟁이 격화되는 모양새다. 2006년 변호사 1만 명이 되기까지 100년이 걸렸는데 8년 만인 2014년 두 배로 늘어났고, 다시 5년 만에 3만 명을 돌파했다. 이러는 사이 변호사 몸값은 뚝뚝 떨어지는 상황. 경기불황에 수임 및 구직 경쟁이 치열해져서다. 
 

로스쿨 도입 후 변호사 합격자 수(1~9회 누적 1만4343명)
로스쿨 도입 후 변호사 합격자 수(1~9회 누적 1만4343명)


올해 9년차인 A변호사는 “개업 때만 해도 400만∼500만 원이었던 일반 민사사건 최소 수임료가 요즘은 200만 원까지 내려갔다. 요즘 젊은 변호사들은 몇십만 원에도 일을 하겠다는 변호사가 생기더니, 이제는 인터넷에서 1만 원짜리 전화상담을 하며 고객을 끌어모은다”며 “민사사건 착수금은 10년 새 반 토막이 났다”고 전했다. 또 “특히 청년 및 개인 변호사 위주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고, 그들 사이 ‘열정 페이’라는 말도 나오는 상황이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에 따르면 2014∼2018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전체 소송건수(민·형사·행정소송)는 650만 건인데, 같은 기간 변호사만 2만700여 명에서 2만8100여 명으로 7000명 이상이 새로 배출됐다. 공공기관·기업 취업을 선택하는 변호사도 많아졌지만, 몸값은 예전과 다르다. 농협은행은 최근 변호사들을 일반 대졸사원과 같은 급으로 채용했고, 서울시 역시 올해부터 변호사 자격 소지자를 기존 임기제 6급과는 달리 일반직 7급으로 채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반면 대형 로펌은 ‘나홀로 호황’이다. 대형 로펌이 몸집을 불리면서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다. 김앤장, 광장, 태평양 등 5대 대형 로펌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0% 이상 늘어나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으며, 한 대형 로펌의 경우 최근 3년간 소속 변호사 수가 30%나 늘었다. 

 한 대형 로펌의 B변호사는 “차츰 변호사들이 생존을 위해 전문성 개발에 노력을 하고 있는 반면, 경쟁이 심해져 변호사협회 차원에서 상담은 유료로 진행하라고 권장하지만, 요즘 시간당 30만 원을 받던 비용도 받지 않고 상담해주는 변호사가 많아졌다”며 “여러 로펌을 돌며 기본적인 설명을 듣고 온 의뢰인들과 사건을 맡기기 전 가격 흥정부터 하는 게 일이다”고 전했다. 반면 경제적 어려움에 직업윤리를 저버리는 사례는 속출하고 있다. 실제 서울지방변호사회에 접수된 의뢰인·변호사 간 분쟁 건수는 2015년 457건에서 2018년 536건, 작년 549건에 달했다. 

이 같은 사안은 의료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가 최근 ‘의대 정원 확대안’을 내놓은 가운데 의사단체들은 ‘지역의료체계 개선 없는 정원 확대에 반대한다’며, 의대 정원 확대 계획을 철회 또는 재논의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회계사도 마찬가지다. 수급을 확대할 경우 질적 하락을 예고한다는 업계와, 서비스 수요 대응이라는 논리로 마찰을 빚고 있다.

◆ 건축사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만,
   건축생태계 시스템은 과거에 머물러
  “지금 설계비가 30년 전보다 
   못하다”는 말도

건축사들은 건축사 수를 단기간 내 폭증시키는 정책을 시행코자 했다면, “최소한의 ‘현장 사전조사, 관련 종사자의 의견수렴’이 필수이며, 건축생태계를 위한다면 산업발전에 필요한 업무대가 현실화부터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축사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대가 등 건축생태계 시스템은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건축사 숫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을 했다면, 그 정도 책임은 져야 한다는 취지다. 실제 건축계에선 “지금 설계비가 30년 전보다 못한데, 업무는 10배 이상 증가했다”, “설계대가 적게 주려는 발주처의 꼼수·독소조항도 산더미”라는 불만이 적지 않다. 

청와대 국민청원 글
청와대 국민청원 글

이제 곧 하반기 건축사자격시험 시행을 앞둔 가운데, 최근 코로나19에 타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축사들이 결국 행동에 나섰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의 건축사 수급정책에 목소리를 내며, 청와대 국민청원에 ▲건축사자격시험 매년 1회로 변경 ▲건축사 수 증가에 따른 ‘건축사 업무영역 확대’를 요구하는 청원을 제기했다. 
극심한 양극화에 전국 95%가 2인 미만 또는 직원을 구할 형편이 안 되는 소규모 사무소가 대다수이고, 1년에 1건도 수주하기 어려운 건축사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한 해에 약 2500명의 건축사가 배출될 경우 건축설계업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건축사사무소 인력난 부담해소 목적으로 ‘시험 년2회’ 확대시행 방침에 대해 대한건축사협회와 건축계 여러 반대가 있었으나 방침을 강행한 바 있다. 관계자들 사이에선, “정부가 5년제 도입 후 건축사보들의 관련 민원을 줄이고, 처우 개선을 ‘자격증 취득’으로 해결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말이 오가고 있다.

청원 게시자는 국민청원 글을 통해 “단순히 건축사 수의 증가로 시민들이 받을 수 있는 건축서비스가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섬세한 정책으로 건축서비스산업을 육성하면서 단계적으로 증가시킨 건축사들이 그에 맞는 보상을 사회적으로 받을 수 있을 때 시민의 안전과 재산이 보호될 수 있다”며 “건축인들이 업무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안전사고 최소화에 초점을 맞춰 달라”고 호소했다. 

◆ 건축사 업무가 
   공적인 일임을 감안해
   사무소 개설을 전제로 
   ‘건축사면허제’ 부활 의견

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장도 청와대 국민청원 동참을 촉구했다. SNS를 통해 “자격 합격자들에게 축하만 할 수 없는 것은 건축사로서의 부푼 꿈과 포부가 곧 현실의 벽에 부딪치며 큰 좌절을 느낄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며 “과잉공급에 의한 경쟁은 오로지 덤핑만이 생존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경제규모에 적정한 건축사 수, 그리고 현재 활동하는 건축사 현황에 대한 조사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건축사의 직능이 다른 이의 집을 짓는 공적인 영역임을 감안할 때, 건축사 자격뿐 아니라 적절한 요건과 경험을 갖추어야 할 것이며, 사무소 개설의 전제로 건축사면허제의 부활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석정훈 건축사협회장은 회원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를 통해서도 “협회는 현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며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에 ‘건축사 합격자 수 조정에 관한 국민청원’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적극 동참해달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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