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석성(石星) 그리고 석정훈

장양순 건축사l승인2018.02.0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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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재야 실증사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홍순언 역관의 기록이 있다. 그가 역관으로 중국 연경에 갈 때 압록강 통주(通州)의 청루에서 자태가 빼어난 여인을 샀다. 그런데 그날 밤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나타났다. 연유를 물으니 “벼슬하다 염병으로 함께 죽은 부모님을 고향인 절강까지 모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부득이 나왔다”고 하였다. 그는 장례에 필요하다는 삼백금을 공금에서 꺼내 그녀에게 주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름을 물어도 알려주지 않고 돈을 안 받겠다고 하자 겨우 성만 알려주었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홍순언은 귀국 후 공금유용죄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즈음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성주 이씨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돼 있고, 고려 왕을 4명이나 차례로 시해했다고 기록된 명나라 ‘대명회전’의 오명을 벗기기 위한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로 10차례나 사신들을 명에 보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에 선조(宣祖)가 교지를 내려 “이것은 역관의 죄이다. 이번에 가서 허락받지 못하면 마땅히 수석역관 한 사람을 목 베리라”라고 하명했다. 이에 모든 역관들이 겁을 먹고 의논하기를 “홍순언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이 없으니 우리가 공금을 대납하고 풀려나오게 해 중국에 보내자. 만일 그 일을 허락받고 돌아오면 그에게 행복이 될 것이고, 비록 죽는다 해도 진실로 한될 바는 없을 것이다”하고, 그 뜻을 알리니 홍순언이 흔쾌히 허락했다.
선조 갑신년에 홍순언이 주청사 황정욱을 수행해 북경의 조양문에 이르자, 뜻밖에도 당시 명의 예부시랑 석성(石星)과 그의 후처가 된 옛날 청루 여인의 영접을 받는다. 석성이 “당신은 통주에서 은혜 베푼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 아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천하의 의사입니다”라면서 연회를  베풀고, 한 달 만에 200년 숙제인 ‘종계무변’을 해결해 주었다. 귀국 후 순언은 왕실의 정통성을 회복해준 공으로 인하여 역관으로는 처음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이등과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졌다..

얼마 안 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은 조선의 원병요청을 꺼려했으나 유독 석성만이 “북경까지 위험하다”면서 적극 찬성하여, 파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왜와의 협상대표로 추천한 심유경의 엉터리 외교로 끝내 석성은 옥사하고, 그의 유언대로 두 아들은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그 와중에서 석성은 조선에 구명하였으나 선조는 외면하였다. 훗날 정조는 “석 상서의 죽음은 우리 때문인데, 은혜를 갚지 못했다”며 한탄했다. 선조는 석성의 아들 석담(石潭)을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토지를 하사했으며, 후손들은 본관을 해주로 삼았다.
석성은 주색에 빠진 황제에게 만류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곤장 60대에 삭탈 관직되고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새 황제가 등극한 후 복직되었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임진왜란의 최대 공로자는 석성이며 이순신은 그 다음”이라고 했다. 이렇듯 강직하며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석성의 후손인 석정훈이 대한건축사협회의 회장에 당선되어 한 달 후에 취임하게 된다. 5만 명 밖에 안 되는 석씨가문의 영광이며, 회원들의 기대 또한 크다. 선조의 강직함으로 어려운 협회를 중흥시키고 건축계 모두가 추앙하는 회장이 되기를 기원한다.


장양순 건축사  cyss1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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