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공모 빌미로 기본설계 없이 실시설계만 발주·계약 꼼수
“남들 다 그렇게 한다, 어딜 감히”…공공기관 부당한 대가삭감에 업계 신음

올해 초 A지자체 ‘청사 증축공사’에 지명공모에 당선된 B건축사는 공공 프로젝트 건축물 설계업무를 수행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과 실망감을 느꼈다. 설계공모 프로젝트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보고는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초 B건축사가 설계공모에 당선된 프로젝트의 ‘청사 증축공사’ 과업범위는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이었다. 현행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상 발주자의 요청에 의한 리모델링 설계업무는 건축설계업무 대가의 1.5배를 적용한다.
하지만 A지자체는 ‘제2종 중급’을 적용해 공사비 대비 4.52% 요율에 맞추더니, 급기야 ‘발주자의 요구에 따른 분리수행업무비율’을 근거로 실시설계비만 발주하는 식으로 58.2%를 적용했다. 신축 설계업무의 150%가 적용돼야 할 프로젝트가 분리발주 적용되며, 적정대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3만 지급하게 된 셈이다. 공사비 20억 원이 넘는 프로젝트 설계비가 졸지에 공사비 대비 2%대인 5천만 원 소액 설계 프로젝트가 돼버린 것.
B건축사는 “경험 없는 젊은 건축사로서 지명공모에 무작정 덤벼들어 당선됐다고 좋아했지만, 적자의 늪에 빠지게 됐다”며 “결국 공모란 건 기본설계비를 아끼기 위한 수단이 된 것인데 리모델링 철거공사 후 기존 도면과 차이가 커져 지속적인 설계변경 요청에 대해 잘못된 설계비 책정문제와 계약조정을 얘기했지만 해법이 없었다. 이는 지자체가 한 개인 건축사를 상대로 벌인 1억 원대의 사기행각으로 볼 수 밖에 없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건축설계시장의 사각지대로 지칭되는 ‘소액 수의계약’도 마찬가지다. 보통 소액 수의계약은 발주기관에서 편의상 자주 행하는 발주행태다. 공모를 하게 되면 시간도 걸리고, 행정절차가 복잡하다는 이유에서다. 

◆ 공공발주사업 적정대가 의무화, ‘적정업무의 적정대가’ 정착 계기 삼아야

지자체 소액 수의계약 조건인 2천만 원 미만으로 용역대가를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기본설계를 건너뛴 실시설계 용역명으로 발주·계약된다. 이 또한 사업의 정상적 단계별 절차를 거치지 않는 발주기관의 전형적인 비용 줄이기 꼼수다.
C건축사는 “기본설계 없는 설계는 없는 법인데, 사실 지자체에 속해 해당 공무원으로부터 소액 수의계약 요청이 오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일을 준다고 생색까지 내는데 공공발주사업의 경우는 익스큐즈(excuse·봐주기)가 없어 2천만 원 용역으로는 이익은커녕 오히려 손해보기 십상이다”며 “언론을 보면 최근 정부예산을 절감한 공무원에게 3억 4300만원 성과급을 지급했다고 하는데 공무원 성과를 위해 정부가 이런 부당행위를 조장하는 건 아닌지 답답할 뿐이다”고 전했다.

◆ 규정 단서조항 근거로 기본설계 건너뛰고,
   업무수행과정에서 임의로 업무요구까지도

최근 한창 의욕적으로 건축활동을 펼치는 젊은 건축사들이 지자체가 발주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적자의 수렁에 빠져 신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통 건축사사무소를 갓 시작하면 별다른 인맥이 없고, 수주능력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공공프로젝트 설계공모에 발을 딛게 된다. 하지만 열악한 현실을 마주하곤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게 된다.
최근 학교 체육관 프로젝트 실시설계를 끝낸 D건축사의 경우에도 정식계약기간이 종료된 후에 지속된 에너지절약계획서 작성, 조달청의 수정 요청 등 사후설계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D건축사는 “계약기간은 3개월 이지만, 추가업무까지 고려해 5개월이 소요됐다. 6천만 원 남짓 대가에서 한 달 반 동안 현상설계 준비하면서 쓴 비용 약 천만 원을 포함해 인건비, 사무실 유지비, 기계·구조·토목 등 협력업체 지출비용을 빼고 나면 사무소 이윤은 0원이 된다”며 “다음 프로젝트를 수주키 위해 리스크를 감당할 여유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건축시장에서 벌어질까? 업계 건축사들은 정상적인 설계대가가 보장되는 적절한 예산편성 검토 없이 ‘예산 끼워맞추기’식으로 설계공모가 무분별하게 발주되고, 국가 또는 지자체 등이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대가에 대해 당연히 부담해야 할 법적 책무 준수를 외면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또 일부 지자체의 경우 ‘공공건축가 제도’를 시행하면서, 자문이라는 명목으로 무료봉사를 요구하는 것은 건축사업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관계자들 사이에선 관행으로 굳어진지 오래라 개선 필요성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C건축사는 “공공을 상대로 프로젝트 수행 시엔 갖가지 꼼수로 50%를 밑도는 대가지급이 비일비재하다”며 “규정의 단서조항을 근거로 기본설계를 건너 뛰거나, 현상안을 기본안으로 실시설계만 계약하고 업무수행과정에서 임의로 추가업무를 요구하는 행태가 만연돼 있다. 하루하루 사무소를 어떻게 운영해나갈지 생존경쟁에 치어 사는 젊은 건축사들의 고혈을 빼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소연했다.
올해 7월 건축도시공간연구소(AURI)의 ‘건축서비스 품질 제고를 위한 공공건축 설계 대가기준 합리화 방안 연구’에 따르면 건축설계 전문가 30인 설문조사에서 공공발주 설계용역 수행 시 부당한 요소로 ▲ 설계변경에 따른 대가 미지급 ▲ 기준보다 낮은 대가지급이 가장 많이 지적됐다. 대가기준 개선을 위한 선결조건으로는 적은 예산 편성 문제로 업무량에 비해 대가가 합리적으로 책정되지 못하는 구조를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고 밝힌다.

◆ 건축사들 발주기관 압박에 합리적 조정요구 못해…
   발주기관 ‘싫으면 관두라’

더 큰 문제는 이런 공공의 슈퍼갑 횡포를 건축사들이 ‘쉬쉬’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설계대가의 합리적 조정요구라도 할라치면 “지금까지 문제없이 잘 해왔는데, 당신만 왜 그러냐.” “설계변경비를 지급해줄 법적 근거가 없다.” “다른 현장도 다 마찬가지다.” “다른 건축사들은 자기 작품이라 여기고 지금까지 잘 해줬다. 당신만 왜 그러냐”며 유·무형의 압박을 가한다.
E건축사는 "당하는 입장에서 할 말은 많지만, 당장 사무소경영을 위해 업무수주에 목을 메는 상황에서 다음 공모·입찰에 불이익이 있을지 몰라 그냥 덮어버리고 속앓이를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선택은 소송일 수 밖에 없지만 이마저도 영세한 사무소입장에선 언감생심이다. 발주기관에 대항해 소송을 거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기 때문이다. 영세한 건축사사무소는 자칫 발주기관에서 외면할 경우 당연히 사무소 경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E건축사는 “신진건축사들이 지자체 공공프로젝트를 수주하려 줄을 서다보니 공공발주기관에선 ‘싫으면 관두라’고 큰소리를 치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건축사업계 관행으로 굳어진 발주기관의 ‘예산 끼워맞추기’식 발주방식과 임의로 법을 해석하고 건축사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행태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E건축사는 “불공정한 발주관행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발주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이 돼야 하고, 참여하는 건축사의 적극적인 개선의지도 중요하다”며 “마침 공공건축물의 설계·감리 대가 지급을 의무화하는 건축사법 개정안(정동영의원 대표발의)이 국회를 통과(12월 8일)하고 공포 절차를 앞두고 있는데, ‘적정업무의 적정대가’를 목표로 대가를 정상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전했다.
건축사협회 류치열 2처장은 “최근 정동영 의원이 발의한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 준수 의무화가 이뤄졌지만, 공공기관의 추가업무·용역기간 증가에 대한 대가미지급 문제와 불공정 계약 개선사항, 그리고 임의로 법을 해석해 행하는 부당한 행위와 함께 발주기관의 규정 준수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 건의할 것”이라며 “공공기관의 억압적 행태에 대해서 피해를 줄일 가이드라인 배급 등 협회차원의 설계비 제값받기 캠페인도 병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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