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대가 보장 위한 ‘민간 대가기준’ 필요

고착화된 저가수주 산업구조, ‘건축물 안전’마저 헐값 될라
건축설계, 안전확보 위한 책임만 부과해 정부 개입 있어야

출혈경쟁으로 왜곡된 건축시장 정상화를 위해선 민간 시장에 적용될 대가기준이 부활돼야 한다는 의견이 건축사업계에서 대두하고 있다. 현재 국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 공공이 발주하는 사업에 국한해 적용되는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이 2009년 제정돼 적용되고 있지만, ‘건축사 용역의 범위 및 대가기준(이하 대가기준)’이 2009년 폐지된 이후 민간 발주 사업에 적용되는 최소기준이라 할 대가기준 자체가 없어 제대로 된 건축설계, 감리가 이뤄질 수 없다는 설명이다. 시장 자율기능에만 맡겨두니 과당경쟁에 따른 저가수주, 가격하락이 지속돼 공공재인 건축물의 품질, 안전에도 영향을 미쳐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정동영 의원이 공공발주 건축설계·감리 ‘적정 대가지급’ 의무화 및 민간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 적정대가 지급을 권고사항으로 하는 ‘건축사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건축사업계는 민간에서도 공공이 나서 대가기준에 대한 최소기준점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건축물 사용자인 국민에게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건축물의 설계 등을 맡은 건축사사무소에도 일정 수익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

◆ 현재 민간 대가기준 없어…공공이 나서 대가기준에 대한 최소기준점 제시해야

대한건축사협회(이하 사협) 백민석 법제전문위원은 “한번 지으면 수 십년 사용하는 건축물을 만드는데 시장 자율경쟁에만 맡기게 되면 건축물의 안전·품질이 위협받는다. 공유지의 비극처럼 공익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며 “현 건축시장 왜곡 정상화를 위한 국가 차원의 업무 질과 양에 부합되는 대가 지불체계를 구축하고 적정이윤이 보장돼 건축물 안전·품질을 기하면서 건축사사무소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현 건축시장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다. 2014년 정부가 건축서비스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한다고 ‘건축서비스산업 활성화 방안’까지 발표했지만, 업계 실상은 에너지절약계획서, 각종 인증·심의, 강화되는 건축기준 등 갈수록 늘어나는 업무량에 비해 가격경쟁에 내몰려 제값을 못 받는 수주가 고착화돼 있다. 사무소 경영악화에 따른 강도 높은 노동과 5년제 건축학과 졸업생의 이탈, 자발적 비정규직 양산 등 업계 지속가능성과 미래를 위협하는 문제가 연쇄적으로 파생되고 있어서다.

◆ 현 건축시장 적정대가의 약 20∼25%로 건축물의 설계 이뤄져

특히 민간시장은 정확한 대가기준 없이 관행에 의존한 저가수주 산업구조가 점점 고착화돼 업무대가는 끝없이 내려가는 상황이다. 2015년 사협 건축연구원이 수행한 ‘민간발주 건축설계업무의 적정대가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실제 수행한 건축설계 프로젝트 174건을 분석한 결과 공사비 요율방식에 의한 설계대가는 3.3제곱미터당 233,867원, 실비정액가산식에 의한 설계대가는 건축사의 시간당 평균 인건비를 적용할 경우 3.3제곱미터당 238,864원이지만, 실제 프로젝트 설계계약금액은 3.3제곱미터당 73,927원으로 나타났다. 시장에서는 적정대가의 약 20~25%만 받고 건축물 설계가 이뤄지고 있다 밝히고 있다.
백 위원은 최근 대기업과 협력업체, 프랜차이즈 기업과 가맹점의 불공정한 관계가 논란이 되어 새 정부가 나서는 등 갑질 문제가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을 언급하면서 “프랜차이즈 기업의 갑질 문제를 건축서비스산업에 비추어보면, 원도급업체라 할 수 있는 건축주, 도급을 받는 하도급업체라 할 건축물의 설계자·감리자·시공자간의 공정거래를 위해서 최저임금제처럼 민간 대가기준 제정과 같은 국가차원의 개입 및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건축물의 실질적 소비자는 사실상 이익추구를 최우선하는 건축주가 아닌 사용자·임차인 등의 실거주자다”며 “적정한 품질과 적정한 대가 확보를 위해선 우선 시장실패를 극복하고 민간에서 가격경쟁이 아닌 품질경쟁이 가능한 수준의 적정대가가 책정돼 지급토록 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저임금제는 일종의 최저가격제에 비유될 수 있다. 최저가격제란 물건 가격이 일정선 이하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가격통제 제도인데, 보통 가격이 떨어지면 수요가 늘어나는 상품과는 달리 노동력은 노임이 떨어지면 손해분을 만회키 위해 노동력 공급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이런 연유로 어느 국가든 시장에서 노임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 근로자를 보호키 위해 최저임금제를 시행한다. 문재인 정부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올 7월 19일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시장만능주의의 확산으로 인한 불평등과 격차 확대, 공공성 약화 현상을 초래함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 행위자로서 역할이 필요하다며 안전, 환경 등에서 국가의 책임성을 강화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김상조 위원장 취임 이후 프랜차이즈, 하도급, 대규모 유통업, 대리점 등 네 개 영역에서 ‘갑을(甲乙)문제’ 해소를 표방한 정책 추진에 나서는 상황이다. 최근 대형 유통업체와 중소납품업체간 거래관행 개선방안에 이어 추가로 하도급 관련 종합대책도 마련할 계획이다.
설계도서 품질을 높여야 한다는 자성론도 나온다. A건축사는 “설계도서 품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자정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한 사람이 1년에 수십 건의 다세대주택을 수행하거나 건축주 의향대로 급하게 인허가에 우선하는 경우 제대로 된 결과물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들이 존재하는 한 건축설계시장 정상화는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국내는 공정거래법에 따라 공익성을 갖는 용역, 담합목적이 아닌 경우에 한해 보수기준을 두도록 하고 있다. 현재 시행중인 국내 타 분야의 보수기준 사례로는 국토교통부내 감정평가업의 ‘감정평가업자의 보수에 관한 기준’, 건설기술용역의 ‘건설기술용역 대가 등에 관한 기준’ 등이 대표적인 예다.

◆ 독일의 경우 ‘설계자와 엔지니어 업무의 대가규정’으로 최소, 최대 대가금액 규정해
   건축물 품질, 공정거래 확보

건축사협회 건축연구원의 김용준 책임연구원은 “법의 나라 독일에서는 설계자와 엔지니어 업무에 대한 대가를 규정하는 ‘설계자와 엔지니어 업무의 대가규정(HOAI)'으로 건물 용도에 따라 대가영역을 1∼5로 구분하고 대가영역별로 공사비에 따른 최소, 최대 대가금액을 규정하고 있다”며 “계약당사자는 대가표에 의한 금액을 기준으로 설계업무에 대한 대가를 합의를 통해 결정하도록 해 공공재인 건축물의 품질은 물론 공정 거래를 위해 심판자격으로 정부가 제도적으로 개입한다”고 설명했다.
건축사법은 1966년 ‘건축사업무 및 보수기준’을 정해놓았지만, 1999년 제정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의 적용이 제외되는 부당한 공동행위 등의 정비에 관한 법률’에 따라 ‘건축사업무 및 보수기준’이 사업자단체에 의한 일종의 가격담합으로 판정돼 공정거래위원회에 의해 폐지됐다. 이때 건축사를 비롯한 변호사, 변리사, 세무사 등 9개 전문자격사 보수기준이 일괄 폐지됐다. 그러다 2002년 건축설계업무에 따른 적절한 대가기준이 없어 발생하는 건축물의 품질저하와 분쟁 예방을 목적으로 ‘건축사 용역의 범위 및 대가기준’이 다시 제정됐고, 2009년 설계비 담합 명분으로 공공 발주 사업에 국한해 사업비 예산을 확보하는 객관적 기준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존 대가기준이 폐지되며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이 제정돼 현재 적용중이다.
한 법무법인 관계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1999년 카르텔일괄정리법에 근거해 전문자격사의 보수기준 조항을 가격규제 폐지라는 명목 아래 일괄 폐지하면서, 각 전문자격사 서비스시장의 경쟁환경 내지 구조적 특성을 개별적으로 분석·검토하지 않은 잘못을 범한 것으로 보인다”며 “공정거래법의 목적에 비춰봐도 공공성을 가진 분야에 한해 시장실패를 개선하기 위한 보수기준 규제는 기본적으로 타당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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